안정적 원료 공급처 필요한 韓, IRA 우회 판로 원하는 中과 이해관계 맞아
‘해외우려기업(FEOC)’ 규정 여전히 리스크로 남아

LG화학은 지난 22일 중국 화유그룹과 양극재 공급망에 대한 포괄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사진=LG화학
LG화학은 지난 22일 중국 화유그룹과 양극재 공급망에 대한 포괄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 사진=LG화학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국내 배터리업계가 약점으로 지목됐던 전구체와 LFP 양극재 부문에서 중국 업체의 힘을 빌려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보유한 배터리 핵심광물에 대한 채굴·정련 관련 노하우, 안정적 원료 공급처를 필요로 하는 한국 업체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회피해 판로를 찾아야 하는 중국 업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다. 

핵심광물·소재의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이유로 ‘탈중국’이 화두에 오르면서 공급망 다변화에 분주했던 배터리업계지만, 당장 중국을 배제하기란 어렵다는 분석이다. 다만 미국이 IRA 관련 ‘해외우려기업(FEOC)’ 규정을 통해 중국 자본이 투입된 기업 모두를 ‘블랙리스트’에 포함한다면 ‘한-중 합작사’의 운영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 SK온, LG화학, 포스코퓨처엠, 에코프로 등 국내 주요 배터리 셀·소재 업체들은 올해 들어 중국과 합작회사(JV)를 꾸리고 배터리 소재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협력 분야는 주로 ‘양극재-배터리 셀’ 생산 전 단계인 ‘핵심광물 정련-전구체’ 생산에 집중돼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4월 중국 야화와 모로코에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삼원계 양극재 핵심 원료인 수산화리튬을 생산하기로 했다. SK온과 에코프로머티리얼즈는 중국 거린메이와,  LG화학은 화유코발트와 함께 국내에서 전구체를 생산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포스코퓨처엠, 엘앤에프 등 배터리 소재 업체들도 중국 업체와 합작사를 차렸다. 

최근에는 국내 배터리업계가 자신하는 양극재 부문서도 중국과 손잡는 사례가 나왔다. 중국 업체들이 90% 이상 장악한 리튬·인산·철(LFP) 양극재 시장 진출을 위해서다. 

LG화학은 지난 22일 화유코발트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모코로에 LFP 양극재 합작공장을 짓기로 했다. 생산 규모는 연산 5만톤(t)으로, 50kWh 용량 전기차 5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양산 시점은 오는 2026년을 목표로 한다. 이곳에서 생산한 양극재는 북미 지역에 공급할 방침이다.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업계는 수산화리튬, 전구체를 비롯해 LFP 양극재까지 국내 기업이 중국과 손잡는 사례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전구체 생산을 비롯해 LFP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양산 경험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합작사 설립을 통해 그간 중국 업체들이 쌓아온 핵심광물 채굴·정련에서부터 전구체, LFP 양극재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 전반의 노하우를 습득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업체들이 꽉 잡고 있는 핵심광물 공급망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7월 배터리 핵심광물의 중국 수입 의존도는 수산화리튬 84.4%, 코발트 81%, 천연 흑연 89.6% 등에 달한다. 전구체의 경우 양극재 가격의 70%를 차지하는 핵심 원료지만, 올해 상반기 국내에 수입된 물량의 97%가량이 중국산이다. IRA 발효 이후 국내 배터리 업계가 ‘탈중국’을 기치로 공급망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당장 중국 의존도를 낮추긴 어렵다는 평가다. 

물론 중국도 얻어갈 게 많다. IRA 등 대외적 리스크를 비롯해 중국 내 배터리 생산능력 확대로 중국 배터리업계는 공급과잉 현상에 시달리는 중이다. 창고에 재고가 쌓이는 상황에서 한국 업체와 손잡고 국내, 모로코 등 미국과 FTA 체결국인 국가에서 공장을 가동하면 IRA 우회를 통해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핵심광물의 40% 이상을 추출 및 가공하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IRA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LG화학과 화유코발트의 합작공장이 들어서는 전라북도 군산시 새만금국가산업단지 모습. / 사진=LG화학
LG화학과 화유코발트의 합작공장이 들어서는 전라북도 군산시 새만금국가산업단지 모습. / 사진=LG화학

중국과 한배를 탄 국내 기업의 행보에 대한 우려섞인 시선도 존재한다. FEOC 규정이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다. IRA에 따르면 전기차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선 오는 2025년부터 FEOC에서 조달한 핵심광물을 써서는 안 된다. IRA가 원용한 인프라법 규정은 FEOC를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정부의 소유·통제에 있는 기업으로 정의한다. 

이에 국내 기업들은 JV 지분율 조정을 통해 FEOC 리스크에 대비하는 모양새다. LG화학 관계자는 “추후 IRA의 FEOC 규정에 따라 중국 업체와 지분 비율을 조정할 방침”이라며 “협의 단계부터 중국 업체와 지분율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의사결정이 이뤄졌다”고 했다. 

다만 양국 기업들이 마련한 대응안이 힘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중국과 함께하는 모든 사업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난 5일 한국무역협회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지침이 우리나라 배터리 공급망에 미칠 영향’ 보고서를 내고 “미국이 기준을 강화해 중국 기업과의 합작사도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최악의 경우 사업을 철회하거나 다른 파트너를 구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며 “조만간 구체화할 세부 지침에 따라 한중 합작 프로젝트들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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