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 국내 전달해 3·1운동 이끌어 내···애국부인회 활동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 지원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마리아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마리아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김마리아 선생은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앞장섰다. 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 지원에도 힘썼다.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란 이름은 개신교의 세례명이다.

선생의 집안에는 애국지사가 많았다. 셋째 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은 신민회원이었다. 만주 통화와 치치하얼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넷째 고모 김필례는 한국 YWCA를 창설한 민족교육자다.

김마리아 선생은 1910년 정신여학교 졸업 후 교사로서 교육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한반도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됐다. 이 시기에 선생은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들이 앞장설 것을 주장했다.

선생은 1914년 일본의 동경여자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조국독립을 위한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은 일본 유학생활 중 1915년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가입했다. 1917년 일본 전체 여자유학생회의 대표가 됐다. 선생은 이 단체의 기관지 ‘여자계(女子界)’를 발행했다.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고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 적국의 심장 동경에서 2·8독립선언 참여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은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됐다. 다음해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다.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기회로 여겼다. 바로 2·8독립선언 계획을 준비했다. 김마리아 선생은 2·8독립선언에 황애덕(黃愛德) 등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선생과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모아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을 지원했다. 2·8독립선언 당일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했다.

보훈처는 “당시 김마리아 선생은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규탄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고 밝혔다.

◇ 2·8독립선언 국내에 전달···3.1운동 계기 마련

김마리아 선생은 2·8독립선언이 일어난 사실을 국내에 전달해 3.1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다. 선생은 동경의 조선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해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판단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감추고 현해탄을 건넜다.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해 부산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상해 신한청년당이 국내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파견한 큰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만났다. 이들은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에서 독립운동 등 활동계획을 논의했다. 이어 선생은 대구로 갔다. 기독교계 동지들을 찾아 자신이 가지고 온 2·8독립선언서를 건네주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선생은 광주로 갔다. 수피아여학교의 교직자와 간호원들을 초대해 여성들의 독립 운동 참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선생은 2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황애덕, 박인덕(朴仁德), 신준려(申俊勵) 등과 동경 2·8독립선언 소식을 서울 지역에 전했다. 여성 독립운동의 전개 문제도 논의했다.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 지도자들과도 만났다. 그들에게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알리고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이종일(李鍾一)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와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했다.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했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했다.'

보훈처는 “선생은 2·8독립선언 직후 그 같은 민족 독립운동의 열기를 국내에 전파해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해 조국 광복을 이루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며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황해도 봉산과 신천 등지를 돌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국에서 전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그 해 3월 5일 선생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갔다. 이 날 서울의 학생들은 서울역 앞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돼 일제에 체포됐다. 경무총감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후 선생은 6개월간 갖은 악형과 고문을 받았다.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 여성 독립운동 단체 ‘애국부인회’ 회장 활동···임시정부에 군자금 지원

출감 후 선생은 침체됐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 단체를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했다.

선생과 애국부인회 임원들은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선생은 애국부인회 회장이 됐다. 애국부인회의 본부와 지부 규칙을 정하고 부서 개정과 임원 개선 등을 통해 조직을 새로 했다.

당시 선생과 임원들은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본회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는데 있다”고 취지문을 통해 밝혔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시했다.

선생은 애국부인회 조직을 확대해 서울·대구·부산·전주·진주·평양·원산 등 15개 지방에 지부를 만들었다.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약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조직원의 배신으로 선생과 임원진 등 52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선생은 황애덕과 함께 3년형을 선고 받았다.

◇ 임시정부 지키기 위해 노력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병보석을 받고 1920년 5월 22일 출감했다. 선생은 1921년 8월 초 중국 상해로 갔다.

선생은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기능을 잃고 있었다. 1921년 1월 26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사임했다. 5월 12일 노동국 총판 안창호(安昌浩) 등 주요 국무위원이 사퇴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에 임시정부를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중요 현안이 됐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김마리아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했다. 선생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임시정부 유지를 주장했다.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됐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해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해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 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돼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 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선생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임시정부의 개조 방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했다.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세력들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끝났다.

독립운동의 분열에 실망한 선생은 그 해 6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1928년 2월 12일 미국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했다. 선생은 회원들과 재미 한인사회의 광복 후원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이후 선생은 1932년 7월 귀국했다. 원산(元山)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강의했다. 신학교에서도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 광복은 1년 5개월 후 이뤄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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