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에 노동자·농민·부녀자 등 전 계층 참여 독려···일제의 경제적 예속에 대항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서상돈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서상돈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주권수호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해 일제 치하를 극복하고자 한 이가 서상돈 선생이다.

일제는 1904년 이후 한반도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했다. 이로 인해 1907년 우리나라의 외채는 1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가 갚을 수 없는 큰 규모였다. 

국채보상운동에는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민족자본가와 지식인, 상인, 부녀자,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 수 많은 국민들이 일본 빚을 갚아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서상돈 선생은 1850년 경북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세에 보부상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보부상 활동 당시 취급한 물품은 소금, 건어물, 일용잡화 등이었다. 선생은 재래시장을 돌아다녔다.

선생은 점점 사업을 확장했다. 취급품은 쌀·소금·베·기름·창호지·건어물·성냥 등으로 크게 늘었다. 원격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활동영역도 넓어져 부산에서 안동까지 다녔다. 35세가 된 1885년 선생은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이 됐다. 선생은 안동·군의·김천·칠곡·달성 등지의 토지를 사들여 대지주가 됐다. 대구지역의 유력한 경제인이 됐다.

◇근대식 교육기관 세우고 민족자본 육성하다

서상돈 선생은 1894년 45세부터 약 10년간 탁지부 시찰관에 임명돼 경상도 세정을 맡았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 그러나 관아에서 파직된 아전들이 선생을 무고하게 투서하거나 고발했다. 이 때마다 천주교 대구 대교구의 로베르 신부는 이러한 고발과 투서가 거짓임을 증명했다.

선생은 교회 활동을 통해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에 선생은 1899년 전후해 대구읍내 새방골·대어빌·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정규옥(鄭圭鈺) 등 교회 내 신자들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학교 운영도 도왔다. 선생은 계산동 성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지원했다.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발전했다. 성립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해 여성 교육에도 힘썼다.

선생은 1905년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 설립에 이일우(李一雨) 등과 함께 지원했다. 달서여학교는 대구지역의 대표 여학교로 발전했다.

서상돈 선생은 만민공동회 참여를 통해 새롭게 변화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주관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중대회였다. 선생은 재무부 과장과 부장을 맡아 열강에 빼앗긴 이권 회수와 민권보호를 위해 투쟁했다.

선생은 1906년 1월 근대교육 보급을 위해 김광제 선생, 정규옥 등과 대구광문사와 대구민의소를 조직했다. 그해 2월 경북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대구광문사 교육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관찰사는 각 군에 학교설립과 서적구입 등에 관한 일체를 대구광문사에 문의하도록 했다.

선생은 김병순·서병오·이장우·이중래(李重來)·이상악(李相岳) 등과 대구농공은행 주주로도 참여했다. 토착 상권 보호와 민족자본 육성 계획이 대구농공은행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구농공은행 주주들 대부분은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 전 민족, 전 지역으로 확대

1907년 1월 29일 서상돈 선생은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했다. 선생은 즉석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200여 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민족, 전 지역 운동으로 발전했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오영근(吳榮根)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했다. 이는 전국 각 지방으로 확대된 국채보상운동을 총괄하는 기구였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 수전소로 야뢰보관 임시사무소, 김상만(金相萬)의 광학서포, 유한모(劉漢模)의 조동 건재약국, 대한매일신보사, 상동 청년학원, 고유상(高裕相)의 서포, 주한영(朱翰榮)의 서포 등 7개소를 지정했다. 의연금 수전소는 황성신문사였다.

전국 각 지방에서도 국채보상회 설립과 더불어 취지서를 발표했다.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 이미지=국가보훈처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 이미지=국가보훈처

보훈처는 “국채보상운동 기간 중 확인이 가능한 국채보상소를 설립한 곳은 전남(제주도 포함) 18개소, 경기 15개소, 충남 20개소 등이었다. 다른 지방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전 계층이 참여했다.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 상인·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유아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자신들의 용돈을 국채보상운동을 위해 냈다.

특히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멀리 미주와 노령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냈다.

당시 한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다”고 감탄하며 4원을 의연했다.

2월 26일 고종황제의 칙어(임금이 몸소 이름)와 함께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커다란 반향을 불렀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국민적 의거로서 공인한 것이었다. 초기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 반응을 보였던 정부대신들도 이 소식을 접한 후 참여했다.

당시 단천군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李炳德)·김인화(金仁化) 등은 ‘국채보상가’를 지어 알렸다.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아홉 살 어린이 이용봉(李龍鳳)도 세뱃돈 얻어 보조하니 감발(감동하여 분발함)할 일이네“

◇ 언론, 국채보상운동 전국 확대에 힘쓰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대됐던 것은 언론의 역할이 컸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은 2월 대구광문사에서 국채보상을 결의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들은 이후 국채보상운동 확산을 위해 힘썼다.

황성신문은 1907년 2월 25일 ‘단연보국채(斷烟報國債)’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을 국민의 의무사항으로 선언했다. 제국신문은 그 해 3월 1일 ‘국채보상금 모집에 관한 사정’이라는 논설에서 국채보상이 정부를 위함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운동임을 선언했다. 5월 27일에는 ‘재외부인의연서’를 통해 하와이 부인들의 의연활동을 소개했다.

각 신문사는 사내에 국채보상 모금처를 설치하고 전 국민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전국 각지에서 조직된 기성회 취지서와 의연금납부자 명단을 게재했다. 이에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금지시켰다. 갖은 방법으로 방해해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서상돈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했다. 실업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자 했다. 선생은 1913년 6월 30일, 64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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