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팀’ 창설 주도 등 뛰어난 국제감각 높게 평가받지만 ‘옥의 티’ 남겨

2000년 6월 22일, 스카이팀 창설당시 조양호 회장(왼쪽 세번째). / 사진=대한항공
2000년 6월 22일, 스카이팀 창설당시 조양호 회장(왼쪽 세번째). / 사진=대한항공

8일 새벽 향년 70세 나이로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대한민국 항공업계의 거목이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조양호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처음 발을 들였다. 당시는 1차 오일쇼크가 한창인 시절이었다. 이후 1978년부터 1980년에도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항공업계 입장에서는 오일쇼크보다 더한 악재는 없다. 연료비 부담으로 미국 최대 항공사였던 팬암과 유나이티드항공은 수천명 직원 감원할 정도였다.

조 회장은 선친인 조중훈 창업주와 함께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 오히려 높이는 전술을 구사했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하며 호황을 대비했고, 그 덕에 오일쇼크 후 새로운 기틀을 잡게 됐다.

재계에 따르면, 조 회장은 특히 세계 항공업계와의 교류 및 협력에 강점을 가졌다는 평가다. 특히 세계 여러 항공사들과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했던 일은 대한항공 성장에 뒷받침이 됐다는 전언이다. 아울러 아시아 지역 항공사들을 스카이팀 회원사로 영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신규 스카이팀 회원사들을 위해 업무 표준화와 기술 자문을 통해 스카이팀 멘토 역할을 해왔다.

스카이팀 뿐만 아니라, 전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들이 회원인 국제협력기구인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특히 IATA 최고 정책 심의 및 의결기구인 집행위원회(BOG) 위원이자, 31명의 집행위원회 위원 중 별도 선출된 11명의 전략정책위원회(SPC) 위원으로서 IATA의 주요 전략 및 세부 정책 방향, 연간 예산, 회원사 자격 등의 굵직한 결정을 주도해 왔다.

이처럼 국내 뿐 아니라 세계 항공업계에서도 거목이었지만, 그의 퇴임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온 가족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는 가운데 조 회장은 횡령, 배임 등 각종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고, 이와 함께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결국 그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재선임 하는데 실패했고, 이후 숙환으로 미국 타지 땅에서 ‘항공업계 거목’답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됐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