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경제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영역

[시사저널e=장민지 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한국음악산업이 글로벌로 진출하면서 국내 아티스트와 기획사들의 체계적인 시스템뿐만 아니라, 그 저변에 자리잡은 팬덤의 끊임없는 문화적 생산성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팬덤문화는 오랫동안 학계의 연구 주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국내 팬덤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유무형의 생산물들은 다시 산업 생태계로 편입되면서 독특한 K-팝 문화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팬덤은 자신이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글로벌 확산 가능성에 다양한 방식으로 열정(및 경제적 자본)을 투자하며, 기획사는 그들의 열망을 식지 않게 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고려한다. 이 생태계 안에서 팬덤은 이용자이자 소비자이고, 동시에 생산자이며 어쩌면 글로벌 유통까지 견인하고 있는 듯하다. 그전부터 팬들의 ‘참여문화’적 성격은 학계에서도 주목받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무언가를’ 자산으로 보기 시작하는, 즉 경제적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움직임은 최근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생산해내는 2차 텍스트(라고 분석되지만 이제는 1차 텍스트의 정의에 가까워진)를 포함해 팬들의 열망과 애정이 동력이 된 다양한 형태의 팬 수행성은 과연 경제적으로 환원 가능한 것인가.

사실 팬덤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은 기본적으로 ‘금전적 이윤’을 위한 동기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팬 대상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애정, 즉 감정을 갖고 향유한다. 이들이 갖는 감정은 수치화될 수도 없고,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 내리려면 개개인의 입을 모두 빌려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종종 수치화된다. 팬덤의 팬 대상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얼마나 팬 대상을 사랑하는지 증명하기 위해 산업은 종종 많은 수치를 들이밀며 팬덤을 카테고리로 만들고 그들을 하나의 소비자(이제는 더 나아가 경제적 이윤을 생산해내는 무형의 자산)로 분석하곤 하지만, 실제로 팬덤 내부의 팬들은 자신의 팬 수행을 금전적 이윤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금기해온 역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많은 팬들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을 통해 금전적 이윤을 취할 경우, 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다시 팬 문화에 환원한다. 이런 팬 문법의 암묵적 확산은 팬들이 팬 대상을 다름 아닌 ‘애정의 영역’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팬 대상은 ‘산업의 영역’에 포함된다. 내가 아무리 팬 대상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들이(혹은 그것이) 경제적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더 이상 그들, 그것을 보거나 향유할 수 없고 애정할 수조차 없게 된다. 그것을 끊임없이 고려하며 팬들은 경제·사회적으로, 동시에 감정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팬 수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은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팬덤의 형성과 확산, 그리고 흥망성쇠는 점치기도 어렵고, 공식화할 수도 없다. 동시에 실제로 팬 대상의 확산에 기여하는 팬들의 수행은 ‘경제적으로 환원해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사실 팬들을 ‘경제적으로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팬덤의 열정은 싸늘하게 식어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