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자신만의 이야기’ 자소서
  • 하은정 우먼센스기자.글 유정임(brandcontents@sisajournal-e.com)
  • 승인 2019.11.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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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30자 이내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어? 뭐라고 소개하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자기소개서가 입시에서는 필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날로 생소한 입시 관련 용어가 쏟아져 나오지만 어느 학교나 전형의 기본 서류는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다. 당장 특목고나 자사고 등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중학교 시절부터 ‘자소서’라는 고지를 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자소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쓰는 글이다. 성장 배경, 성격의 장단점, 학교 생활, 지원 동기 등을 공통적으로 포함해 자신을 알려야 한다. 정해진 글자 수 안에서 ‘나’라는 사람을 개성껏 소개해야 하니 당연히 사람마다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의 독창성보다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소위 ‘합격용 자소서’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국문학과 출신의 젊은 후배가 자소서 첨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용돈 벌이로 아이들이 써 온 글의 ‘문장 정리’ 차원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문장 첨삭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의식이 들었다. 아이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도록 인생을 날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후배는 수입이꽤 괜찮은 그 일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내 아이의 자소서를 앞에 두고 혹여 아이 인생을 내 뜻대로 변조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부모로서 나도 두려웠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처음으로 쓴 아이의 자소서. 사춘기에 들어선 전투적인 중학생은 딱 잘라 말했다. 자소서는 자신의 이야기니까 엄마의 눈높이에서 한 단어라도 손대면 안 된다는 엄포였다. 나는 속을 끓였다. 어쩌다 아이가 없을 때 슬쩍 들춰보았다가 몇 단어 훈수를 두면 불같이 화를 냈다. 주위에서는 엄마가 작가니 아이가 도움을 많이 받을 거라고 여겼지만 언감생심,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이는 자소서의 독서 기록란에 만화책도 기록했다. 만화책은 빼라고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만화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꿈이 애니메이션 PD이니 좋은 만화를 많이 본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속 터질 일이었다.

그런데 면접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입학사정관이 아이의 자소서를 보고 한마디 했단다. “내가 입학사정관 하면서 만화책을 써온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아이는 움찔했다. 그러나 바로 밑에 쓰인 장래 희망을 보고는 “아하! 그래, 프랑스에서는 만화도 문학이지!” 아이는 면접을 마치고 콧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자소서가 인정받았다는 자신감이었다. 결코 다른 학생의 자소서에서는 나올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라는 게 포인트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다른 학생의 합격 자소서 중좋은 것을 베낀다거나 여러 경로로 자소서 쓰는 팁을 얻기도 하지만 종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자소서 문장 구조 안에 내 이야기를 짜깁기하려면 자연스러운 문맥을 이루는데 한계가 있고, 더구나 유사도 검색 기술이 놀랍게 발전해 베낄 수도 없다. 훌륭한 자소서를 원한다면 부모가 미리 도울 수는 있다. 나는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하자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이용해 아이의 생활에 대한 메모를 시작했다.

아이가 툭툭 던진 이야기들을 짤막하게라도 적어놓았다. 학교에서 칭찬받은 일, 시험 계획에 실패해 괴로워한 일, 친구 사이에서 난처해했던 일, 누군가를 기꺼이 도왔던 일, 거절해놓고 속상해하던 일 등을 간단하게라도 기록했다. 그리고 아이가 자소서를 쓰기 전에 메모를 정리해 넘겨주었다. 아이는 자신이 잊어버렸던 일이라며 탄성을 지르고 놀라워했다. 기록들은 자소서 항목의 교우관계, 학교생활 등등 여러 항목에서 아이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정작 자소서에 들어갈 내용은 한두 가지밖에 없다며 웃었지만 아이는 흥분하며 읽어 내려갔다. 자신의 열정과 의지를 다시 돌아볼 수 있어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된 건 분명했다.

자소서는 늘 입시의 중심에 있지만 정답은 하나다. 아이가 기억하는 사실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기록하게 하자. 단, 바쁘게 뛰고 달리느라 지난 시간을 잊기 쉬우니 부모는 꾸준한 메모로 아이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가 할 수있는 가장 쉽고 건강한 일이다

 

글쓴이 유정임

MBC FM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가 출신으로 현재 부산·경남 뉴스1 대표로 근무 중. 두 아들을 카이스트와 서울대에 진학시킨 워킹맘으로 <상위 1프로 워킹맘>의 저자이다.

 

우먼센스 2019년 11월호

https://www.smlounge.co.kr/woman

에디터 하은정 유정임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하은정 우먼센스기자.글 유정임
하은정 우먼센스기자.글 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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