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사우디의 중동 재편 위한 게임…"유대인·아랍인 모두 피해자일뿐"

예루살렘 구시가지 모습. 저녁이면 멀리 보이는 이슬람 황금 사원에서 아잔 소리가 들리고 근처 통곡의 벽에선 유대인들이 기도를 올린다. / 사진=이용우 기자
차갑고 거칠지만 조용하고, 가끔 슬퍼 보이는 회색빛 도시. 한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사람들의 뇌리에 찬란하고 위대했지만 한 소설을 통해 그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뀐 적이 있다. 기자가 이십 대 때 읽은 '나의 미카엘'의 저자 아모스 오즈는 예루살렘을 그렇게 슬픈 도시로 그려냈고, 신의 위대함보다 인간의 고통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소설을 들고 기자도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저녁이면 이슬람 황금 사원에서 들려오는 아잔 소리와 통곡의 벽에 선 유대인들의 기도 소리가 뒤섞이는 광경을 바라봤다. 그것은 언제라도 파괴될 수 있는 미약한 평화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 이후 더욱 그렇다.

최창모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중동연구소장)도 그래서 예루살렘을 설명할 때 '부조화의 조화'라는 표현을 썼다. 그를 찾은 건 순전히 이스라엘과 중동, 미국의 관계를 말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다"라고 공식 선언하면서 기자가 본 예루살렘의 불안한 평화는 더는 확신하기 어려워졌다. 중동연구소장이면서 중동의 복잡한 셈법을 이해할 수 있는 학자의 생각을 들을 때가 온 것이다. 그는 이미 여러 저서와 기고문을 통해 이스라엘을 말해 왔고 정부가 중동문제로 고민할 때 외교적 조언을 해왔다.

하지만 최 교수가 시오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난 아모스 오즈의 책을 번역했다는 점은 몰랐다. 기자는 그를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루살렘 수도 선언 이후 일어난 국제적 비난과 우려, 전 세계가 이토록 예루살렘에 민감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아울러, 그 안에 사는 유대인의 정신과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만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를 표피적으로만 다루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고 봤다. 

최창모 건국대 교수(중동연구소장) / 사진=김률희 영상 기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언하면서 중동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역시 중동 문제는 세계 문제라는 생각이 났다. 특히 트럼프의 빅마우스(Big mouth)가 이번에도 중동 문제를 세계 문제로 만들어냈다. 중동지역은 국제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자칫 잘못 건드리는 순간 뇌관으로 작용한다. 중동 지역의 역사와 종교, 경제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트럼프가 이를 건든 것이다.

트럼프의 이런 결단의 내막에 무엇이 있는가.

핵심은 미국 내 유대인의 파워이다. 세계 유대인의 파워를 한 덩어리로 놓고 보면 미국 내의 유대인 파워는 막강하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대 엘리트들이 미국에 빠르게 정착하며 정치, 법조, 재계, 언론을 차지해왔다. 미국을 움직일 만큼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유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집단화하는 데는 성공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되려면 유대인의 지지가 필요하다. 정치 후원금 상당 부분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이익과 관련해 철저하게 로비한다. 트럼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는 러시아 스캔들 등으로 사면초가였다. 이번 예루살렘 선언으로 모든 뉴스 헤드라인에서 러시아 스캔들은 사라졌다.

여기에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젊은 지도자 모하메드 빈 살만이 중동의 패권을 잡기 위해 미국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 살만은 최근 비밀리에 이스라엘을 방문해 이스라엘 측에 헤즈볼라(레바논 시아파 무장단체) 공격을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이스라엘-사우디로 연결된 삼각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중동 패권 지도를 다시 짜려 할 것이다. 아랍의 흥분 상태는 그가 원한 바다. 아랍권이 이에 말려들면 안 된다. 흥분하면 트럼프가 짠 전략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아랍권은 물리적 충돌을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힘의 재편이 일어난다.

다윗의 별 문양으로 바라본 예루살렘 구시가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일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선언하면서 예루살렘에는 이에 반발하는 팔레스타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 상태가 고조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AP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중동국가. 이들의 평화와 공존은 불가능한가.

그 지역을 말할 때 평화와 공존은 너무 낯선 언어다. 평화와 공존을 위해 화해가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없는 곳에 화해와 공존, 평화는 불가능하다. 두 민족 사이에는 비극적 역사가 존재한다. 시온주의 운동부터 시작하면 100여년으로 이어지는 역사다. 당장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하기엔 그들의 비극이 너무 크다. 대화의 복원이 필요하다. 이는 정치의 복원이자 인간의 복원이다. 오슬로 평화협정 등 대화의 노력은 있었으나 종이에 불과했다. 인간의 복원을 위한 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둘은 피를 흘리며 싸웠다. 악수하고 없던 일로 할 수 없다. 많은 대화가 필요한데 트럼프가 상처를 긁는 꼴이 됐다.

유대인도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받은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것. 아이러니하다.


비극 중의 비극이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었다. 가장 괴로운 주제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몸부림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글을 쓴다. 히브리대학 박사학위를 위해 7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살 때였다. 아침이면 이슬람 모스크에서 아잔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교회 종탑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이게 뭘까. 그 소리 안에 '부조화의 조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조밀한 골목엔 커피 냄새, 땀 냄새, 피 냄새, 사람 냄새가 난다. 깃발 하나 꽂고 내 것이라는 것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 이 도시가 누구의 소유여야 하는가? 모두가 공유할 순 없는가. 유대인은 행복하게 살고자 이 땅에 왔다. 그들은 유럽에서 비극적으로 살았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답게 살고자 국가를 만들었다. 따뜻한 집에서 살 권리를 찾고자.

지금은 팔레스타인을 밟고 나라를 만들고 있다. 팔레스타인 어머니는 자녀들을 자살폭탄 테러로 내보낸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린다. 이 지경까지 됐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것. 인간이 가장 비열해질 때 나타나는 마지막 미치광이들의 놀이다. 그 땅에 이런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지 말자. 모두가 피해자다. 종교가 중요한가. 유대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그 속에 인간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라 할 수 없다. 그 땅은 인간을 배제한 채 공존과 공멸을 고민하는 곳이 됐다. (트럼프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은) 이스라엘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다.
 

최창모 건국대 교수. / 사진=김률희 영상 기자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는, '예루살렘의 회복'이 그토록 중요한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기원전 586년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유대인이 포로 잡혀 간다. 그들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시를 썼다. '우리는 언제나 시온을 그리워하며 늘 노래한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말한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눈을 뜨고도 꿨다. 백일몽,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후 로마에 의해 유대인은 다시 흩어진다. 2000년 동안 그 꿈을 꾸게 된다. 시온주의가 거기서 나온다. 1896년에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대국가' 책을 쓴다. 조상들이 꿈꾸던 그 꿈을 우리는 잊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그들에게 영원한 꿈이었다. 유대인이라면 예루살렘하면 가슴이 뛴다.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없었다면 지구상에서 유대인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주인이 유대인인가는 다른 문제다. 예루살렘의 주인이 누구인가.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수도로 정했던 시기는 500년 밖에 안 된다. 이슬람은 1200년, 기독교는 500년~600년이다. 나머진 외세가 다스렸다.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이 수천 년 동안 삶을 이어갔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깊게 읽어야 한다. 맥락이 빠지면 일반화의 오류에 걸린다.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는 것이 간단한 명제 같지만 역사적 맥락은 이토록 복잡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예루살렘을 왜 한 민족만이 소유해야 하는가. 모두가 공유할 수 없을까.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 그래야 다양성이 존중되고 대화와 평화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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