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 업체 전체 연구개발비 보쉬의 25%…“긴 숨 갖고 변화 나서야”

이항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이 국내 자동차 부품 업계가 맞은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사진 = 권태현 영상기자

“국내 자동차 산업 위기는 국내 부품 업계의 붕괴로 시작할 것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이 국내 자동차 부품 업계의 무사 안일주의를 지적하고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우리나라를 향한 통상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국내 자동차 부품 업계는 완성차 업체에 기댄 채 이에 맞설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이 선임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최근 자동차 산업 주도권은 완성차 업체에서 부품 업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만여개 개별 부품이 하나로 모인 부품 덩어리가 자동차라는 점은 고려하면 부품 업계의 자동차 산업 주도는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친환경차, 자율주행자동차까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단순 기계부품보다 융합 전장부품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다만 국내 대부분 자동차 부품 업체는 여전히 완성차 업체 아래에 귀속된 종속 계약 형태를 고수하며 업체 간 기술 협력을 등한시하고 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인해 환율 변동성이 커지면 해외 생산공장을 갖춘 완성차 업체가 겪는 피해보다 수출로 부품 납품에 나서는 국내 부품 업체가 겪는 피해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 대부분은 시장 변화에 맞설 기술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제너럴모터스(GM) 등 거대 자동차 업체가 위기를 겪으면서 나타난 공급부족 사태 덕에 생산 확대에만 매진하면 매출 확대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기술 개발은 뒤로 밀려났고,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실제로 완성차 업체와 종속 계약을 끊고 공급처 다변화에 나섰던 국내 부품 업체들은 지난해 해외에서 단 한 곳과의 납품 계약도 따내지 못했다. 미국, 유럽 시장 부품 업체의 기술을 따라갈 수 없었던 데다 중국 시장의 가격 경쟁력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양적 성장에 기댄 결과는 참혹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는 한 해 약 6조원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지난해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 전체가 연구개발에 들인 돈은 1조5000억원이다. 국가 전체로 확대하면 격차는 더욱 커진다. 지난해 독일은 자동차 산업 전체에서 45조원을 연구개발에 쏟았다. 일본과 미국은 각각 38조원, 25조원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국내는 7조5000억원에 그쳤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흔들렸던 자동차 산업이 구조개편을 끝내고 친환경차, 자율주행차 등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치를 전망”이라며 “지금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될 예정인데 2010년 이후 양적 성장의 달콤함에 젖었던 국내 자동차 산업은 갈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이제라도 정확하게 실태를 파악하고 경쟁력 강화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어 이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는 그동안 국내 자동차 부품 산업의 실태를 치부를 드러내서 뭐가 좋겠냐는 이유로 제대로 분석조차 않았다”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기가 확대하고 있는데 이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는 경보 시스템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자동차 산업은 ‘스텔스 이노베이션(기술 노출을 이유로 기술 혁신의 단계를 공개하지 않는 것)’의 첨단에 놓여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공급 부족 사태에서 판매량을 확대하며 성장의 달콤함에 젖어있는 사이 연구개발비 통계 분석이 가능한 2010년 이후부터 독일과 200조 넘는 기술 격차가 생겼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한 후 긴 숨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변화에 나서야 한다”면서 “2030년이면 전체 자동차 판매량 1억2000만대 중 부가가치가 크고 수익성이 높은 친환경차 시장이 3700만대 시장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현대차 연간 판매량의 4배가 넘는 이 시장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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