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로는 인공지능‧IoT 생태계 못 만들어…정부는 재정 지원과 제도개선 치중을
“어떤 경우에도 회사이름은 노출되면 안 됩니다. 정부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걸로 비춰지면 위험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4차 산업 관련 기업 종사자들은 향후 산업발전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현재 대한민국 신산업 육성과 관련해 정부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대답이었다.
산업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등 신산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줄을 잇고 있다. 신산업을 주관하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과거와 같이 정부가 주도권을 잡고 길들이는 방식은 오히려 기업들의 독자적 전략과 생태계를 망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근혜 정부에서 만든 지능정보기술연구원(AIRI)을 들 수 있다. 해당 연구소는 태생부터 논란이었다. 이세돌 9단이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와 2국을 벌인 바로 다음날 정부 부처 간부들은 AI(인공지능) 개발 정책을 만든다며 회의를 열었고 곧바로 민간 기업에게 돈을 걷어 지능정보기술연구원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뚝딱 세웠다. 삼성전자, SK텔레콤, 네이버 등 기업들은 연구소를 만드는데 갑자기 만들어진 정책에 30억 원 씩 출자하게 됐다.
이 기관은 과학기술계의 ‘미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지만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해당 문제를 지적해 온 안정상 더불어민주당 정책실장은 “민간 기업끼리 출자해 만드는 회사의 단장을 미래부 장관이 임명하고 관련 인물들도 정부 관련 인물들이 가서 맡는 건 정상이 아니다”라며 “기업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한 만큼 사실상 정권이 끝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설립 자체가 민간의 필요가 아닌 정부의 주도로 이뤄지다보니 기업들은 돈만 2중으로 나가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비브 랩스를 인수하고 네이버는 독자적으로 인공지능 개발 조직을 만들며 각자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인공지능 전략을 알아서 펼치고 있다. 지능정보기술연구원에 30억 원을 출자하지 않았으면 해당 조직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출자에 참여한 한 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특별히 도와주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 그냥 가만히 두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 독일 민간 연구기관 DFKI 사례서 배워야
전문가들은 신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독일의 DFKI에서 힌트를 얻으라고 말한다. DFKI는 민간기업과 대학 등이 힘을 합쳐 만든 비영리 연구기관으로 구글 등 글로벌 업체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 기관이 독일 정부에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독일 정부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안정상 정책실장은 “DFKI처럼 민간기업과 학교들이 스스로의 필요성에 맞게 자연스럽게 생태계를 구성하게 해주고 정부역할은 이들이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이나 제도 개선에 국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기업들이 자연스럽게 융합과 협력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꼭 필요한 재정 지원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것이다.
국내 이통사 한 관계자는 “소프트웨어 정책을 70년 대 제조업 육성할 때와 같이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며 “정부가 앞에 나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접근방식으론 IoT나 인공지능과 같은 산업은 키울 수 가 없다”고 지적했다.
수용자가 아닌 지원 주체 입장에서 이뤄지는 학계에 대한 정부의 투자 행태도 현재와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포스텍의 한 교수는 “정부가 중복투자가 이뤄지는 것에 민감해 과거 지원을 했던 연구과제는 투자를 피하다보니 억지로 중복되지 않는 연구를 찾으려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중복이 되더라도 연구가치가 있으면 투자를 해야 관련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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