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연봉제 도입 공공기관 50여곳 적법성 여부 소송 제기…“사기 공화국 될 것”
정부가 올해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적용 대상을 확대하면서 돈에 의해 공익이 희생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업무성과에 따른 연봉 차등 지급이 민간 기업에는 합리적이지만, 공공부문에서는 성과주의에 따른 공익성 훼손이 나타날 수밖에 없어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주장이다.
반면 정부는 공공부문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보상이 업무 성과와 연계되게 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임금도 자동으로 상승하는 호봉제 탓에 공직사회에 무사안일주의가 퍼졌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공공기관이 성과중심으로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달부터 기존 4급 공무원으로 이상 직급으로 제한했던 성과연봉제 적용 범위를 공무원 일반직 5급 및 경찰·소방·외무·군무원 등 5급 공무원에까지 대폭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성과연봉제를 적용받는 공무원 비율(국가일반직 기준)은 현재 8.0%에서 15.4%로 늘어난다.
정부는 이어 교통공사, 관광공사를 포함한 119개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에도 성과연봉제를 시행하게 했다. KDB산업은행, IBK기업은행, 한국예탁결제원, 수출입은행 등 금융부문 기타공공기관은 성과연봉제 시행에 대비해 올해 자체적으로 마련한 성과평가 체계를 운영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성과연봉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 “공공성에 성과와 같은 경쟁이 들어가선 안 돼”
이에 대해 해당 공공기관 근로자는 노조를 중심으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국민의 안전과 편익을 증진하기 위한 공공부문의 노력을 돈으로 환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과연봉제 확대 시행을 도입한 공공기관 중 약 50개 기관은 이미 성과연봉제 도입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철도노조 관계자는 “호봉제가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에 맡겨서는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재화나 서비스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제공하는 곳이 공공기관”이라며 “공공기관에서 성과연봉제를 시행하면 단기적인 평가에만 급급해 오히려 국민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성과연봉제 선도 기관으로 지정돼 2011년 2월부터 성과연봉제를 시행해 온 보훈병원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신생아실과 분만실을 폐쇄했다. 반면 이중 진료, 과다처방을 통한 과잉진료로 성과연봉제 시행 1년 만인 2012년 진료금액이 2303억원에서 2726억원으로 18.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진료 인원은 5.2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밖에 서울 도시철도공사에 저성과자 퇴출제도가 도입된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시스템 장애 신고 건수가 급감하기도 했다. 담당 직원들이 불리한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작은 사고는 은폐하고 다른 부서로 책임을 떠넘긴 탓이다. 2010년 소방방재청이 화재로 인한 사망률 10% 감소를 목표로 성과주의를 몰아붙일 당시에는 화재 관련 통계가 조작되기도 했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은 “공공부문에서 경쟁과 효율이 강조돼 공익성이 훼손되면 결국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에게 돌아간다”면서 “당장 이윤과 경영효율만을 기준으로 공공부문의 성과를 따진다면,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들은 접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성과급에 매달리면 동양증권 사태와 같이 실적 높이려고 직원들이 말도 안 되는 금융상품을 팔고, 사회를 위한 공공서비스는 없어지고 사기 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노동 격차 해소와 일자리 창출은 허울”
문제는 정부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도입 확대 행보를 이어갈 전망이라는 데 있다. 지난해 12월 기획재정부는 전체 금융공공기관의 성과급 지급 시기를 2018년으로 늦추자는 금융위원회 요구에 수용 불가를 못 박았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성과연봉제는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는 태도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호봉제가 청년 일자리 부족의 원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 주택금융공사 등 금융공공기관 중 준정부기관으로 분류된 다섯 곳에 올해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부터 당장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신보 등 다섯 곳은 올해 임직원들의 업무 실적을 평가받아 당장 내년부터 전체 급여의 30%까지 확대된 성과급을 개인별로 차등 지급 받게 된다.
하지만 정부가 내세운 성과연봉제가 청년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호봉제에서 성과연봉제로 임금체제를 개편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선 임금 총액 감소와 저성과자 퇴출이라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한데 정부가 추진하는 성과연봉제로 이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는 호봉제에서 성과연봉제로 배분 방식만을 바꿀 뿐 임금 총액은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직원 임금 지급액을 줄여 신규 채용에 나서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저성과자를 퇴출해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인사혁신처가 지난달 발표한 공무원 보수규정에 따르면 3회 연속 저성과자로 선정된 근로자라해도 퇴출이 아닌 직위 해제에 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건강보험공단 노조 관계자는 “정부가 이야기하는 노동 격차 해소와 일자리 창출은 허울에 불과하다”면서 “정부는 기재부 행정부 복지부에 연을 둔 사외이사들을 이용해 임시이사회를 열고 멋대로 임금지급 규정을 바꾸는 등 국민 피해만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입자 불편을 해소해주는 공단 직원에게 강요할 실적이라고는 민원을 처리하지 않고 끌거나 무시하는 것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노조는 ‘성과 평가에 대해 안전장치가 필요하고 평가의 객관성과 능력을 키우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한다”며 “정부에 오남용 방지 장치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답을 기다렸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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