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연구회 동지들과 조선어 사전 편찬
학생들에게 우리 국어와 역사 교육
3.1운동 적극 참여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윤재 선생/ 자료=국가보훈처
이윤재 선생/ 자료=국가보훈처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서 우리 국어와 역사를 지키는데 혼신의 힘을 바쳤다.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 동지들과 함께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 뛰어들었다. 이들은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다”고 밝혔다. 학교에서는 우리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감옥에서 순국했다.

◇ 학생들에게 우리 국어와 역사를 교육하다

선생은 1888년 경남 김해부 우부면 답곡리(현재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6살 때인 1894년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10여 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 무렵 일제는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선생은 국망의 상황을 외세에 대항할 민족의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당시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개화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을 길러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맹렬히 계몽운동을 했다. 계몽운동은 언론, 정치, 사회단체, 종교 등 각 부문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민족교육이 중시됐다.

선생은 1908년 김해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김해의 합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했다. 또한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에서 고등과정을 이수하며 선생은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윤재 선생은 당시 한글의 권위자인 주시경을 사숙하면서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에 봉직하면서 민족교육을 했다. 창신학교는 의열단 단장으로 명성을 날린 김원봉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한말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선생은 이 학교에서, 그리고 1917년부터는 의신여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선생은 일제에 의해 조선사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암암리에 우리 역사를 교육해 청년 학생들의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길렀다.

◇ 3.1운동과 민족교육 앞장서다···‘쾌걸 안용복’ 발표

선생은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 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앞장서 계획하고 주도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경에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고 그 해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민족운동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당시 선생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하던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절대독립론자인 신채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선생은 북경대학 사학과에 입학해 3년간 근대 역사학을 공부하고 1924년 3월 졸업했다.

선생은 북경대학에서 수학 중 국내에서 최남선이 발행하던 잡지인 동명에 [중국의 새 문자], [몽고 민족의 독립운동], [중화민국 의회소사],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정계와의 충돌], [경한철(京漢鐵)종업원 총동맹 파공(罷工)의 전말], [호적(胡適)씨의 건설적 문학혁명론], [민중 혁명화하는 중국의 학생운동] 등 주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민족의 주체인 민중의 직접혁명에 의한 민족독립을 주장하던 신채호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9월 귀국한 선생은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오산학교는 한말 신민회의 민족교육기관으로 이승훈에 의해 설립돼 평양의 대성학교와 함께 서북지방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여기는 신채호가 만주로 망명하기 직전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이었고 이승훈은 신채호의 신민회 동지였다. 신채호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는 선생을 이승훈에게 소개해 오산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서게 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산학교에 근무하면서 선생은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수양동우회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와 같았다. 흥사단은 한말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던 안창호가 1913년 5월 미주에서 조직한 민족독립운동자의 인격수양 단체였다. 선생은 1926년 4월 서울 협성학교로 옮겨 근무하면서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인 동광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했다. 조선 숙종시대 일본 어민들을 물리치고 울릉도와 독도를 사수한 안용복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 조선어 사전 편찬 동참하다

1927년 8월 선생은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하며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 조선어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어연구회는 한말 학부대신 이재곤의 발의로 1907년 7월 학부 안에 설치돼 1909년 12월까지 활동했던 국문연구소를 연원으로 한다. 국문연구소는 위원장 윤치오와 위원 주시경, 어윤적, 이능화, 권보상 등으로 구성됐다. 주시경은 한말 국망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이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려 했다. 즉 조선어 연구와 그 성과의 보급은 민족운동으로서 성격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면서 식민교육이 본격화됐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도 어려워졌다. 더욱이 1914년 주시경마저 사망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주시경의 제자들인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김윤경 등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이 연구회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말과 글의 보급을 통한 민족독립의 달성을 지향했다.

이 연구회는 1927년 2월 <한글>이라고 하는 기관지를 창간해 조선어 연구의 대중 전파와 보급에 힘썼다.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도 추진했다. 사전 편찬 사업은 1910년대 초 주시경과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광문회에서 착수했다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 이것을 다시 추진한 것이다.

선생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 동지들과 함께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 동참했다. 이 사업은 1929년 1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새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와 선생, 기존 회원들의 활약으로 일대 전기를 맞았다. 선생과 회원들의 노력으로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이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인식을 확산했다.

이에 기반해 “조선 문화의 쇠퇴와 민족의 낙오는 무엇보다도 조선어문의 불통일에서 기인됐다”고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1929년 10월 각계의 인사 108명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는 우리말과 글의 정리와 통일은 단순한 어문의 통일만이 아니라 장래 민족의 독립을 기약하는 일이라는 인식에서 이뤄졌다.

이에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추진됐다. 이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 데는 1927년 10월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선생의 [세종과 훈민정음], 그리고 1928년 5월 <별건곤>에 발표한 [세종성대의 문화] 등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조선 얼굴의 거울, 조선 마음의 거름”을 표방하면서 1928년 선생이 창간한 잡지 <한빛>의 영향도 도움이 됐다.

◇ 민족독립 희망을 심다···한글과 우리 역사 전달에 힘써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학술적 책임을 맡은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확대 발전했다. 이 때 선생은 상임감사로 선출됐다. 그리고 정인승, 이중화, 한징 등과 함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선발돼 민족적 대사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시기 선생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 조선어도 가르쳤다.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사업으로 우선 어휘의 수집과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년간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조선어학회는 경향 각지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이윤재 선생이 한글강습회에서 강사를 했다.

1932년 1월부터 <한글>을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복간, 발행해 민족의식을 북돋워 일으켰다. 여기서도 선생이 편집 및 발행을 주관했다.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사업만 아니라 한국사와 관련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선생은 1930년 3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에 28회에 걸쳐 [대성인 세종대왕]을, 10월부터 11월까지는 25회에 걸쳐 [성웅 이순신]을 발표했다.

1931년 2월에는 <신생>에 [동방의 위인 이이 소전], 1931년 11월 신동아에 [충의 의인 민충정공]과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선생은 국난극복의 영웅들과 민족문화 창조의 위인들을 소개한 이 같은 글을 통해 당시 팽배하던 민족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민족독립의 희망을 주고자 했다.

◇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표준말 모음’ 발표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도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한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선생은 역사 및 한글 학자들과 함께 순수 학술단체로서 1934년 7월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실증적인 연구방법론을 통해 식민사학에 대항한 것이다. <진단학보>를 통해 회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해 국학 발전을 이뤄갔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는 드디어 사전 편찬을 위한 첫 작품을 내놓았다. 선생을 비롯한 18명의 작성위원들이 여러 차례의 독회와 축조 심의 끝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했다. 1936년 10월에는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준으로 표준말 사정 작업을 거쳐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해 발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 이미지=보훈처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 이미지=보훈처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체···고문으로 옥중 순국

이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던 중 선생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는 1935년 2월 안창호의 가출옥 이후 조직이 확대되고 민족성이 강화되고 있던 수양동우회를 무력화하기 위한 일제의 책략이었다. 또한 중일전쟁 도발을 앞둔 시점에서 일제가 자행한 민족운동 탄압책의 일환이었다. 선생은 1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출옥 이후 곧바로 민족의 염원인 사전 편찬 사업에 매진했다. 선생은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1940년 4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성안해 발표했고, 그 해 6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조선어 사전 편찬의 준비 작업을 진행해 갔다. 그러나 선생의 한글 사랑과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겨레 사랑은 1930년대 후반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인 ‘황민화 정책’과 정면 충돌했다. 그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선생과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42년 10월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이었다. 일제는 침략전쟁에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민족말살정책의 완성을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식민지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용 금지 및 말살, 그리고 이에 대신하는 일본어 상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일제는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혈안이 됐다. 그 빌미가 된 것이 함흥 영생여학교 4학년 학생인 박영옥의 일기 내용 중 일부였다. 일제 경찰은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우리말로 대화하다가 발각돼 조사받게 된 박영옥이 2학년 때 쓴 일기 중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문구를 찾아내 이를 트집 잡기 시작했다. 이 때의 국어란 일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 자에 벌을 주었다는 것은 반일적인 처사로 그 배후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해 박영옥 등 영생여학교 학생들을 고문 취조했다.

일제 경찰은 영생여학교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전임 위원이자 그 학교의 전임 교사였던 정태진임을 알아내고 그를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체포 압송했다. 일경은 온갖 악형과 고문을 해 정태진으로부터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이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백 받았다.

◇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선생을 비롯한 33명을 체포해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했다.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해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1년여의 조사를 통해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고 해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했다. 일제 경찰은 이 같은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에게 이른바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했다.

특히 이윤재 선생에 대한 고문은 더욱 가혹했다.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지면상에 한국사와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기 때문이었다. 사전 편찬의 실무 책임자로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을 만났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에도 관련되는 등 이른바 ‘전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결국 선생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1943년 12월 8일 새벽 함흥감옥의 차가운 시멘트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이 희망만은 어느 때 까지든지 꼭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까지도 잘 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루면 잘 살고, 이루지 못하면 잘 살지 못할 것까지도 안다.(…)오늘부터 우리가 전민족적으로 대방침을 세우고 대계획을 정하자. 그리하여 너니 나니 가리지 말고 오직 한 깃발 아래 모여서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 이것이 이 신년에 정할 조선 민족의 만전지계라 부르짖는다.

 

- 1927년 선생이 신년의 희망을 밝힌 글 중에서([동광] 제9호, 19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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