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라인···배터리는 미국·유럽·중국 중심의 생산기지 구축
경제효과 따지면 반도체에 못 미쳐···정부 나서 배터리, 포스트 반도체 만들어야

“삼성전자는 40만평에서 3만4000명이 근무한다. 이익은 400억~500억원 수준이다. 반도체는 10만평에서 1만명이 근무한다. 반면 5000억~6000억원 수준의 순익을 낸다. 삼성이 대대적 변신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1993년 발언 중 일부다. 미국 LA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이르기까지 장장 68일 동안, 1800여명의 임직원들 앞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지향점을 제시했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다.

행보의 마지막 지명을 따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일컬어지지만, 단순히 특정 장소에서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는 일반적인 선언과는 결이 달랐다.

1993년의 선언이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은 삼성뿐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이날의 선언이 일종의 전환점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 신화를 써내려갔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권을 쥔 시장을 삼성 그리고 한국이 주도하게 만들었다.

4차 산업혁명과 AI시대를 맞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기도 하다. 이 회장의 선언이 나온 지 20여년이 흐른 뒤, ‘포스트 반도체’로 불리는 산업이 등장했다. 배터리가 그것이다. 전기 콘센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배터리를 낳았고,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지만 오늘날 배터리의 의의는 전과 다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내연기관으로 대표됐던 자동차 엔진의 변화이자 친환경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할 인류의 궁여지책으로 평가된다. 상용화를 이유로 당장의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누구도 배터리 산업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라 예견치 않는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여러 국가의 복수의 업체들이 그 주도권을 쥐기 위해 한판 전쟁을 치를 준비가 돼 있다. 종주국인 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한국의 업체들이 오늘날 이 시장의 주역으로 분류된다. 점유율면에서 기술적인 면에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앞선 수준을 보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LG화학을 필두로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 등이 참전한 상황이다.

배터리가 반도체에 견줄만한 신(新)성장동력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배터리를 포스트 반도체로 불러야 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적어도 반도체가 우리 사회,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그 만큼의 폭발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반도체 공정은 한국에 있다.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은 반도체업체로의 취업을 희망한다. 관리직·연구직·생산직 등 직종을 망라하고 인기가 높다. 취업이 되면 일터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기도 한다. 신규 반도체 라인이 들어서면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 가격 뿐 아니라 주택들이 덩달아 들어서며, 유동인구가 높아지면서 상권도 형성된다. 흔히 말하는 경제유발효과다.

아주 단편적인 예시다. 반도체가 잘 팔리면 이를 만드는 삼성, 그리고 오너일가를 포함한 주주들 역시 큰돈을 번다. 그들만 벌지 않는다. 고용된 노동자들뿐 아니라 라인이 들어선 일대가 흥한다. 대부분의 반도체가 수출된다는 점에서, 외화를 벌어 내수를 배불리는 구조다. 이건희 회장의 선언이 비단 삼성만의 전환점이 아닌 까닭이 여기 있다.

배터리 업체들도 국내에 생산기지를 뒀지만, 반도체만큼의 유발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들의 신규 공정 투자는 글로벌 3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미국·중국·유럽 중심이다. 현지 인력을 채용하고, 현지를 배불린다. 국내에 미치는 경제유발 효과가 없다곤 볼 수 없으나, 반도체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래서 배터리는, 적어도 아직까지, 포스트 반도체가 아니다. 배터리 업체를 탓해야 할까. 어불성설이다.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 현지에 짓는 것보다 이득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윤을 창출해야 할 기업은 그저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고민의 주체들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신규 부가가치 창출은 기업 혹은 국민 개개인이 아닌 정부, 그리고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고심해야 할 부분임에도, 여전히 정부는 책임을 기업에 떠넘긴다. 배터리 업체들이 이 땅에 라인 증설을 염두 할 수 있는 토대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

우리 기업이기에, 한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배터리를 통해 창출될 이윤은 기업 몫이다. 배터리가 진정 포스트 반도체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몫은 기업이 아닌 정부 몫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의 혜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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