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소재 국산화율 수년간 제자리···정부 R&D 지원 예산도 매년 줄어
한국형 테스트베드 구축해야···선택과 집중에 따른 정부 지원 요구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개최된 긴급토론회 / 사진=윤시지 기자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개최된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 토론회에서 패널들이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 사진=윤시지 기자

 

"이런 이슈가 있을 때만큼은 업계 협조가 잘 된다. 그러나 이번엔 시스템 자체를 구축해 놔야 한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를 계기로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후방 산업의 근본적인 자생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계는 정부가 장기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사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공학한림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등 과학기술계 기관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방안’을 주제로 긴급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시행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오는 28일 이후 앞서 수출 규제 대상으로 꼽힌 소재 3개 품목을 포함, 800여개 이상 품목의 수출 심사가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 방식으로 전환될 전망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올해 20개 품목의 대체재 마련을 지원하고, 7년간 7조80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해 80개 품목의 국산화를 지원하기로 했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영향으로 신예츠, 호야, 모리타 등 일본 공급사들이 생산 차질을 겪었을 때 우리 기업은 재고를 확보하고 공급사를 다변화해 극복했다"면서도 "그 당시에도 소재 국산화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6개월 후엔 없던 얘기가 됐다. 이번 정부 지원안도 미봉책에 그치면 어느 순간 또 반복하게 된다. 장기적인 지원 계획을 통해 국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간 국내 부품, 장비, 소재 업계는 일본 등 업체에 비해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세계 D램 시장에서 74%,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49%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국내 반도체 소재, 장비 국산화율은 제자리였다.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은 2011년부터 48%에 정체됐고,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013년 21%에서 2017년 18%로 오히려 뒷걸음쳤다. 

박 교수는 “기존의 '국산화'라는 개념은 다소 현실적이지 못 했다”면서 “수요 업체인 대기업은 국산 제품이 세계 최고 수준이 되지 않는 한 절대 사용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국내 소자 업계가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선 품질 및 기술 우위를 점한 외산 제품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국내 후방 산업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지면서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사업도 주춤했다. 산업부 소관 반도체 분야 R&D 사업 지원 예산 규모는 매년 감소해, 지난 2009년 1000억원 규모에서 2017년 314억원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박 교수는 이번 사태가 전방 대기업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국내 후방 업계 경쟁력을 갖출 기회로 작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에 이번 정부 지원안에 따라 소재부품특별법을 상시법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이 분야에 대한 핵심 기술 지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심화할수록 중장기적인 주력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중소·중견 업계의 실질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품 성능을 자체 평가할 수 있는 한국형 테스트베드가 절실하다고 분석했다. 현재 국내선 12인치 웨이퍼 기반 개발 제품의 성능을 테스트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서 반도체 장비 업체 중 오직 4개 업체만 12인치 패턴 웨이퍼를 자체 평가하고 있으며, 장비·소재·부품 전체 업체로 따져봤을 때, 5.8%만이 12인치 패턴 웨이퍼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소재기업의 경우 소재 자체에 대한 특성평가 랩을 보유하고 있어도, 소자 업체에서 요구하는 12인치 웨이퍼 기준 장비 대응이 가능한 시설은 갖추지 못했다. 

박 교수는 "국내 소재 업계의 문제는 제품 자체 평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소자업체 연구소 및 생산라인과 동일한 분석 장비를 갖춘 12인치 웨이퍼 기반 전·후 공정 테스트 및 측정 전용 테스트베드를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이 확보한 전·후공정 측정 설비를 확보한 성능팹이 있다면 정말 빠르게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업계는 정부가 장기적인 구심점을 가지고 지원책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일각에선 정부 지원이 기술 '국산화'라는 목적보다 전방 소자 업체가 채용할 만한 품질 및 기술 경쟁력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특히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국내 후방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전방 기업과 기술 협력을 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영수 솔브레인 부사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고 품질을 확보한 소재, 장비, 부품 제품을 선택하면서 시장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전략을 그동안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기술 ‘국산화’ 보다 소자 업체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과 제품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단순 국산화로는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며 "모든 품목을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는 선택의 집중 전략이 중요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이종수 메카로 사장은 “국산화 대책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소자 업체의 주도 하에 정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정말 근본적으로 우리 업계가 확보할 수 없어 공급선 다변화가 필요한 품목인지 잘 선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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