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100억 이상 영화가 흥행 싹쓸이…"창작자보다 자본 논리 우선되는 풍토에 위기감"

지난해 개봉한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영화 인천상륙작전. 이 영화의 총제작비는 150억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8월 서울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 상영관 모습. / 사진=뉴스1

가히 100억원 전성시대다. 1년 14편의 100억원 이상 제작비 영화가 나오기 시작한 한국영화계 얘기다. 한때 100억원이 꿈의 숫자로 여겨지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블록버스터라는 낱말도 더 이상 할리우드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익성도 좋다. 지난해 개봉한 상업영화들을 조사한 결과 돈을 많이 투자할수록 투자수익률이 높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문제를 찾는 시각들이 있다. 블록버스터는 소재가 넓지 않다. ‘돈’에 어울리는 작품들이 있어서다. 돈은 공격적으로 투자하지만 결국 블록버스터 중심 제작환경이 보수적‧안정적 전략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지난해부터 영화계에 급격히 유입되는 재무적 투자자들의 자금이 고예산 영화로 쏠릴 가능성도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최근 발표된 영화진흥위원회의 2016년 한국영화산업결산 보고서에서 시중집중도만큼이나 눈길 끄는 대목은 한국영화 제작비와 투자수익성 변화추세다. 앞서 기자는 극장업계서 독과점이 심화되고 이 영향으로 스크린 몰아주기 경향이 짙어지고 있음을 1, 2편에서 드러냈다. 이와도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 게 바로 ‘대작영화’ 전성시대다.

영진위는 지난해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302편의 한국영화 중 연 40회 이상 상영된 작품 178편을 대상으로 제작비 총액 조사를 실시했다. 직접 제작사와 투자배급사에 접촉해 확인하는 방식이다. 조사대상이 178편인 까닭은 IPTV 등 부가판권 시장을 노려 형식적 개봉을 택한 영화들을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 한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24억원이었다. 19억 9000만원이던 2015년에 비해 크게 뛰었다. 다만 앞서 밝혔듯 2016년부터 조사방식이 연간 40회 이상 상영영화로 좁혀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눈길 끄는 건 다음이다. 블록버스터급이라 할만한 100억원 이상 제작비 영화가 2015년 6편에서 지난해 14편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나서다. 이에 비해 80~100억원 규모 영화는 줄었다. 총제작비 80억원 이상 영화편수는 20편으로 전년(19편)과 비슷한데 100억 이상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물량을 쏟아 붇는 블록버스터 제작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투자수익성은 얼마나 될까? 여기서 100억원대 영화의 특징이 오롯이 드러난다. 조사에 따르면 총제작비 100억원 이상을 투자한 영화의 투자수익률은 53.3%였다. 단계를 하나만 낮춰도 투자수익률은 크게 떨어진다. 80억원 이상~100억원 미만 제작비 영화의 투자수익률은 6.7%에 그쳤다.

흥미롭게도 제작비가 내려갈수록 수익성이 악화되는 특징이 엿보였다. 50억원 이상~80억원 미만 총제작비를 쓴 영화들의 투자수익률은 –19.3%에 그쳤다. 30억원 이상~50억원 미만 영화들은 –27.7%였다. 10억원 이상~30억원 미만의 총제작비를 쓴 영화들의 투자수익률은 –42.4%로 나타났다. 10억원 미만 영화의 투자수익률은 –1.3%로 다소 개선됐지만 표본이 적었다.

이에 대해 영진위 산업정책연구팀은 “이제 고예산 영화는 2012년 이후 원금회수 측면에서 안정적이고 상당히 높은 수익도 기대할 수 있는 상품이 됐다. 이에 따라 교직원공제회, 우정사업본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등 기관투자자나 운용자산이 있는 공적기구가 메이저 한국영화 투자배급사 라인업에 직접 투자하는 행태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IBK기업은행과 KDB산업은행도 자사의 자체 자본과 내부 또는 관계 자산운용 조직을 활용하여 영화와 드라마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문화계 큰손으로 떠오른 은행의 움직임은 국내 영화제작환경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이정환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부장은 최근 본지 금융담당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려 사업성이 있다고 결론이 나면 투자가 확정된다. 현재 콘텐츠 투자 평가모형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배우가 A급이다. 유명한 감독이다. 이러면 A, B, C 등 점수로 환산해 투자 금액,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식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관련기사: [인터뷰] '문화계 큰 손' 이정환 기업銀 문화콘텐츠부장)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연습실에서 열린 문화정책 대안모색 연속토론회 모습. 이 자리에서 영화분야 발제에 나선 전영문 영화프로듀서(가장 왼쪽)는 블록버스터 중심으로 짜인 한국영화계의 현실에 쓴소리를 던졌다. / 사진=고재석 기자

최근에는 사모펀드도 적극 나섰다.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은 메이저 투자배급사 쇼박스 영화 라인업에 투자하는 ‘코리아에셋 SHOWBOX 문화컨텐츠 전문투자형 사모펀드’를 지난 13일에 출시했다. 조성 후 3년간 쇼박스에서 투자 배급하는 모든 영화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3년 간 200억원을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비(非)블록버스터 영화에도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한 영화업계 관계자는 “극장, 투자배급사, 제작사 등 각 주체들 사이에서도 협상력이 중요하다. 블록버스터 A영화에 중‧저예산 B영화를 끼워 파는 식의 협상이 가능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선 이정환 부장의 인터뷰에서도 이 같은 사례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현장은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새다. 영화제작환경 자체가 왜곡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지적이다. 다수 영화가 1000만 관객을 겨냥해 제작되면서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이 실종되리라는 우려도 크다.22일 문화산업 관련 토론회에 나선 전영문 영화 프로듀서는 “지금은 모두 다 100억짜리 영화만 만들려고 한다”라며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블록버스터 제작환경이 얼마나 가겠나. 제살 깎아먹기가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그는 “영화산업에 창작자의 권리가 전무하다. 권리가 제작사로 가고, 다시 투자사로 가는 식”이라며 투자중심으로 짜인 영화산업 환경을 우려했다.영진위 진단도 같다. 영진위 측은 보고서를 통해 “(중·저예산 영화 투자수익률 적자는) 재무적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는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보력을 높여서 작품별 투자책임회사와 협상만 잘 한다면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고예산영화만 골라 투자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수익률에 따라 움직이는 제작자본은 점점 더 중·저예산 영화 투자를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한국영화가 맞이한 아이러니한 산업구조가 이 같은 현상을 심화시킬 공산도 크다. 고예산 영화 수익률은 높아지지만 산업성장이 정체국면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016년 전체 영화산업 매출은 2조 2730억 원으로 2015년 대비 7.6% 증가했지만 관객 수는 2억 1702만 명으로 2015년보다 되레 0.1% 감소했다. 2010년 이후 첫 역성장이다. 매출은 지난해 극장업계가 단행한 ‘가격차등화’ 덕을 봤다. 연간 관람횟수는 이미 4.2회로 아이슬란드(4.22회)에 이어 세계 2위다. 국내서 더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다.극장도 포화다. 지난해 기준 전국 극장수와 스크린수는 각각 417개, 2575개다. 2015년(388개, 2424개)보다 되레 더 늘어난 셈이다. 어느새 전국 좌석수는 42만개를 넘어섰다. 올해는 투자배급사 NEW도 씨네스테이션Q라는 멀티플렉스를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외형은 늘어나는 데 막상 이를 소비할 관객은 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업계의 우려도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서정 CJ CGV 대표는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영화산업 미디어포럼에서 기자들에게 “극장도 많이 늘었다. 영화 개봉편수도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며 “(그런데) 국내 영화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은 늘고 영화편수도 늘었는데 관람객이 안 늘었다. 이 상황서 제작, 배급사의 극장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런 구조적 상황 탓에 블록버스터 중심 제작환경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파이가 적어질수록 투자수익률이 높은 작품으로 몰릴 수밖에 없어서다. 이리되면 규모의 경제를 갖춘 대기업 자본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내수시장의 제작구조가 수출 시장서도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국내용 블록버스터 영화가 할리우드나 중국영화와 차별화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전영문 프로듀서는 앞서 토론회에서 “할리우드 뿐 아니라 중국영화가 부상하고 있다. (그들과) 대항했을 때 질적으로 승부를 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질적 제작에 집중할 구조를 만들어 세계시장서 경쟁해야 한국영화가 살아 남는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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