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아의 취준진담

“다시 태어나면 누구로 태어날 거야?” 가볍게 던진 질문에 친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시 안 태어날 거야. 이렇게 힘든 데 왜 또 태어나.” 이 친구는 빈말하는 법이 없다. 예상치 못한 결연함에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자 친구는 “왜 웃어? 진지한데”라며 멋쩍어했다. 이 친구는 평소에 가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라며 일탈하곤 한다.

You Only Live Once 앞 글자를 딴 욜로족(YOLO)이 트렌드라고 한다. 인생 한번 뿐이니 즐기자는 뜻이다. 현재 삶을 긍정하는 생활방식이다. 직장 관두고 여행 떠나거나, 적금을 깨서 사고 싶은 물건을 고민하지 않고 산다. 불투명한 미래 대신 현재 행복을 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얼핏 낙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에 비관이 일면 서려있다. 생(生)에 대한 비관이다. 진정으로 생을 긍정한다면 과거와 미래를 부정할 필요 없다. 욜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은 고통’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현실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다시 과거와 미래에 갇힌 답답한 현실이 시작된다.

최근 삼성 입사시험에 ‘삶과 죽음’의 관계를 묻는 객관식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소녀와 소년’이었다. 반의어 구분능력을 묻는 문제였다. 소녀와 소년 간 성정체성을 배제해 논란이 일었다. 나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눈길이 갔다.

미지의 영역인 사후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이는 소망에 근거한 신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우리가 인생이 한 번이라고 믿는 건 어쩌면 제발 그러기를 바라는 비관적 소망이 아닐까.

이 시대 청년은 타인과 분리된 채 부유한다. 오로지 세상과 분리된 ‘자기’만 남아있다. 청년은 집착할 대상이 없다. 사라지면 그만이라며 소소한 행복을 누린다. 관계성이 제거된 청년의 생은 일회적이다. 무언가와 연결된 느낌이 없다면 내세를 믿을 상상력도 바닥난다.

불교는 연기(緣起)를 설한다.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 세상 모든 건 연관돼있다. 생도 그렇다. 전생에 업을 지면 이로 인해 현세가 나타난다. 현세라는 업은 또 다른 보, 내세를 낳는다. 세상에 집착하면 생은 그 다음 생으로 끝없이 실선처럼 이어진다. 죽음 뒤 또 다른 생이 시작된다. 다시 태어남을 상상하려면 다시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 생을 집착해야 한다.

일회적 행복을 계속적으로 꿈꾸면 점이 선을 이루듯 결국엔 삶 전체를 긍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욜로는 비관 속에서 낙관을 찾는 능동적 노력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굳이 떠나지 않고 미래를 버리지 않더라도 현실을 집착할 수 있는 생이라면 더 낙관적이지 않을까. 일탈이 아닌 일상 속에서 진정한 낙관이 가능하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소망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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