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웅의 콜라주 소사이어티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자신의 거취를 여·야 합의를 통해 결정해달라고 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탄핵안이 마련되고 여야 간 합의를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탄핵 정국을 개헌 정국으로 바꾸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지만, 야3당은 곧 바로 반박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며 독일 경제·정치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서문에 나오는 이 말이 떠올랐다.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을 둘러싼 한 번의 비극과 한 번의 소극은 무엇인가.

풍경 하나.

일본 센고쿠(戰國) 시대의 혼란을 마감하고 태정대신 겸 간파쿠(觀白)의 지위에 올라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나고야성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죽으면서 마에다 토시이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한 다이묘 5명에게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당부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이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재를 맡던 마에다 토시이에마저 죽으면서 결국 붕괴된다. 이 붕괴가 무력을 통해 결정적으로 표출된 것이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를 따르는 다이묘들로 구성된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를 필두로 한 다이묘들의 연합인 서군 간 벌어진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를 거두고, 그는 쇼군에 즉위해 에도 바쿠후를 연다. 

 

도쿠가와는 일본 제일인자에 올랐지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하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난공불락의 오사카성과 그 성을 거성으로 눌러앉은 토요토미 히데요리였다. 비록 바쿠후를 개창하면서 일본 제일의 권력자가 된 그지만,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존재는 얼마든지 친 토요토미 가문 다이묘들의 구심점이 돼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단 유화책으로 히데요리에게 토요토미 가문의 본원사찰인 호코지(方廣寺)를 재건하라고 권유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소진시킴과 동시에 잘하면 전쟁의 구실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호코지를 재건하면서 종명(鐘銘)으로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 새기면서 사단이 났다. 즉 가(家)와 강(康)을 둘로 나눈 것은 도쿠가와(德川家康)을 자른 것이고, 신풍(臣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토요토미"를 뒤집어서 이어붙임으로서 도쿠가와 가문을 저주하고 토요토미 가문의 재건을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 정벌을 결심한다.

도쿠가와 군은 오사카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오사카성과 그 성의 이중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만든 못)는 이 성이 왜 난공불락의 요새인지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전쟁은 해를 넘겨 계속되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화친을 청한다. 단 조건이 있었다. 화친의 의미로 이중 해자 중 바깥쪽 해자만 메우면 바로 철군하겠다는 것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인 요도도노는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약속을 믿고 해자를 메우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속임수였다. 도쿠가와는 대군을 동원해 순식간에 이중 해자 모두를 메우고 오사카성을 공격해 함락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죽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된다. 도쿠가와 막부는 잠재적 경쟁자마저 제거하고 일본 천하의 패권을 공고히 한다.

풍경 둘.

10월 24일 최순실의 태블릿 컴퓨터가 공개되면서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이래 한 달여 동안 청와대와 여당은 오사카성에 갇혀 기약 없는 농성전을 벌이며 저항하는 토요토미 히데요리 군에 불과했다. 야당과 시민들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성하는 도쿠가와 군처럼 보였다. 이미 바깥쪽 해자(새누리당 내 비박계)까지 거의 메운 상황인데, 토요토미 히데요리 쪽에서 항복을 요청했다. 단 화평의 의미로 바깥쪽 해자만 원상복귀하면 바로 항복하겠다고.

이 화평 제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다. 자신들 세력을 결집하고 야당과 시민들을 지치게 해 상황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다. 공성전이 장기로 이어지고, 공격하는 쪽의 세력이 다양할 경우 수성하는 쪽이 유리하다. 

그러나 이미 역사의 교훈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제안을 믿고 해자를 메꾸도록 허락한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어찌 되었는 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제안하는 쪽은 바뀌었지만, 기약 없는 농성전을 하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번에 와해되는 것은 공격하는 야당과 시민들이 된다.  

 

다행히 야당의 당 대표와 원내대표들은 모두 저 화평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거부했다. 이는 시민들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공성전을 벌이고 해자를 메우는 것이 옳다.

쇠뿔도 단김에 뽑고, 쇠는 달구어져있을 때 두드리고 정의는 실천할 수 있을 때 실천해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역 회군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저들의 꼼수는 단순히 눈앞의 위기만을 면하기 위한 꼼수일 뿐, 진정한 화평의 의미가 아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