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자국 내 원전 확충 파트너 필요”
한수원·WEC, 지재권 분쟁 봉합 뒤 합작 법인 설립 논의
체코 원전 ‘불평등 합의’ 논란, 美 시장 진출 발판 이어져
세계 최대 시장 열리지만 ‘제2 굴욕 협상’ 우려도 상존

원전 확대 행정명령 서명한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원전 확대 행정명령 서명한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체코 원전 계약을 둘러싼 ‘불평등 합의’ 논란이 뜨겁게 이어지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논란의 출발점이었던 미국 웨스팅하우스(WEC)와의 합의가 한국 원전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 원전 확충 계획을 추진하며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공식 요청한 사실이 확인되면서다.

한수원과 WEC는 지난 1월 지식재산권 분쟁을 봉합한 이후 ‘팀 코러스(Team Korea+US)’ 구상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 공동 진출하기 위한 합작 법인 설립을 논의 중이다. “체코 수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굴욕적 합의였다”는 정치권 비판과 달리, 원자력 업계에선 “미국 시장이라는 새로운 수출길을 열어젖힌 계기”라는 평가가 동시에 제기된다.

◇ 트럼프 “한국 참여 기대”···美 원전 확충 로드맵

21일 통상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에너지 당국 접촉 과정에서 미국 고위 당국자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원전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우리 측에 전달했다. 미국은 양국 기업 간 지재권 분쟁이 해소되고 수출통제 준수 원칙에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을 협력 여건 조성으로 평가했다. 특히 “제3국 수출보다 시급한 것은 미국 내 신규 원전 확충이며 한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석연료 부활 기조와 함께 원전 설비용량을 현재 100GW에서 오는 2050년까지 400GW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신규 원전 인허가 기간을 18개월로 단축하고 2030년까지 최소 10기 착공을 추진한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추가 건설 규모만 300GW, 원자로 약 300기에 해당하는 전례 없는 계획이다.

지난 1979년 스리마일섬 사고 이후 신규 건설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미국 내 공급망은 붕괴 상태다. 원천 기술을 보유한 WEC 조차도 시공 경험이 단절돼 반도체 업계의 ‘팹리스’처럼 설계에만 강점을 가진 기업으로 남았다. 미국 입장에선 실제 건설·조달·운영을 총괄할 파트너가 필요하다.

현재 해외에서 원전을 독자적으로 수출·건설할 수 있는 국가는 프랑스 전력공사(EDF)를 앞세운 프랑스, 그리고 40여 기의 시공 경험을 축적한 한국 정도다. 이에 업계에서는 “미국 조선업 부흥 프로젝트 ‘마스가(MASGA)’처럼 원전에서도 전략적 협력이 가능하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최종 계약을 체결한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자력발전소(원전) 조감도. / 사진=한국수력원자력
한국수력원자력이 최종 계약을 체결한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자력발전소(원전) 조감도. / 사진=한국수력원자력

◇ 체코 논란의 아이러니···“굴욕이 기회로”

문제의 발단은 올해 1월 체결된 한수원·한전과 WEC 간의 지재권 합의였다. 여기에는 ▲원전 1기당 약 2400억 원 기술료 지급 ▲9000억 원 규모 기자재 구매 ▲북미·EU·영국·우크라이나·일본 단독 수주 제한 ▲소형모듈원전(SMR) 수출 시 WEC 승인 필요 등의 조항이 담겼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두고 “매국적 불평등 조약”이라며 국정조사까지 거론했다. 반면 산업부와 한수원은 “원전 산업 구조상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반박했다. 체코 원전 수주를 위해 지재권 분쟁을 종결하지 않았다면 계약 자체가 무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WEC는 2022년 체코 입찰 과정에서 한국을 상대로 지재권 소송을 제기하는 등 미국 법원과 체코 당국에 잇따라 문제를 제기하며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이번 합의로 불확실성을 해소한 덕분에 한국은 26조원 규모 체코 두코바니 원전 2기 수주에 성공했다.

오히려 WEC와의 합의는 미국 시장 진출의 전제 조건이 됐다. 미국은 자국 원천 기술이 포함된 원전을 제3국에 수출할 때 반드시 미국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이번 합의로 지재권과 수출통제 문제가 정리되면서 오히려 한국이 미국 내 건설 파트너로 공식 무대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한국전력이 일본 도시바의 미국 원자력발전 자회사인 웨스팅하우스의 유력한 인수자로 떠오르고 있다. / 이미지=조현경 디자이너
 / 이미지=시사저널e DB

◇ 합작 논의···“게임체인저” vs “또 다른 종속”

한수원과 WEC는 현재 합작 법인 설립을 위한 출자 규모·지분 비율·사업 범위를 두고 협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국회에서 “유럽보다 미국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히며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업계는 만약 합작이 현실화된다면 한국 원전 산업에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미국은 단가가 가장 높은 시장일 뿐 아니라 제3국 수출처럼 별도의 승인 절차도 필요하지 않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이 열린다면 굳이 프랑스와 경쟁하며 유럽에서 고전할 이유가 없다”며 “건설·기자재 등 전후방 산업 전반에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합작 구조에서 WEC가 주도권을 쥔다면 체코 계약 논란과 같은 제2의 굴욕 협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수원과 WEC는 지분 배분과 사업 주도권 문제에서 아직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 공은 李 대통령에게

오는 25일 예정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에서도 원전 협력이 주요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미 양국은 관세 협상 과정에서 원전을 포함한 2000억달러 규모 투자 패키지를 논의한 바 있다. 반도체·배터리·조선 등과 함께 원전 협력 방안이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황 사장이 정상회담 직전 미국 출국 일정을 잡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황 사장 등 한수원 관계자들은 오는 23일 미국으로 떠나 WEC 측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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