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에 트럼프까지 '이중고'···'리더십 공백'에 협상력 약화 우려
美투자 국내 기업, 보조금 조기 현금화 등 대응 방안 마련 분주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재계는 긴장하며 대응책 마련에 분주했다. 대관 등 유관 부서는 트럼프 당선 후 대응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미국 관료 출신 인재 영입을 통해 트럼프 당선인과의 접점을 늘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통상외교 정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미외교 공백이 장기화할 수 있어 관세 등 정책에 대응할 ‘골든 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재계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 韓·美 접점 마련 나선 경제단체
18일 재계에 따르면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등 경제단체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대비해 국내 재계를 대표해 대응 전략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 10일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미국상공회의소에서 ‘제35차 한미재계회의 총회’를 열고 양국 기업인들의 경제동맹 강화를 약속했다. 양국 기업인들은 ‘강력한 기술동맹’을 통해 반도체·반도체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 협력을 공고히 하기로 했다.
한경협 사절단은 한미재계회의를 계기로 미국 핵심인사들과의 ‘아웃리치’(대외협력) 활동도 이어나갔다. 미국 의회 내 지한파 모임인 코리아 코커스 소속 토드 영 상원의원, 아미 베라 하원의원, 마이크 켈리 하원의원 등을 비롯해 트럼프 1기 출신 인사들과도 접촉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16일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통상정책 핵심 참모였던 스티븐 본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대행을 초청해 트럼프 2기 대응 전략에 관해 묻는 자리를 마련했다. 본 전 대표대행은 세미나를 통해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때보다 워싱턴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 가운데 미국과 무역하는 국가들에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할 전망”이라고 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대응책 마련을 위해선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과 가능한 한 빠르게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 재계, 관료 출신 ‘미국통’ 모시기 전쟁
본 전 대표대행의 조언대로 국내 10대 그룹들은 미 정치권과 인연이 있는 인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기업은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네트워크 구축이 0순위 업무가 될 정도”라며 “대외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만큼 기업들은 글로벌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달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북미통’ 외국인 경영자인 호세 무뇨스 사장을 임명하는가 하면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를 대관 담당 사장으로 지명했다. 성 김 신임 사장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지정학적 이슈에 대응하는 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은 지난 2022년에 북미 지역 대외업무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에 역할을 맡는다. 본부 글로벌 대관조직인 글로벌퍼블릭어페어스(GPA)는 외교통상부 출신의 김원경 사장이 맡는다. 김 사장은 각 해외총괄별로 있는 대외협력팀의 대관 업무를 관장하면서 워싱턴과도 소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는 지난 16일 마이클 쿨터 전 레오나르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DRS 글로벌 법인 사장을 해외사업 총괄 대표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쿨터 내정자는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부차관보, 국방부 차관보 대행, 국방부 국제안보 담당 수석 부차관보 등 정부 핵심 보직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포함해 한화그룹의 글로벌 방산 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LG는 트럼프 1기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지낸 조 헤이긴을 워싱턴사무소장으로 영입했다. 최근 SK는 미 상원 재정위원회 국제무역 고문과 무역대표부(USTR) 부비서실장을 지낸 폴 딜레이니를 미국 대외협력법인 SK아메리카스의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 “트럼프 집권 전 ‘바이든표 보조금’ 받자”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IRA, 반도체지원법(칩스법) 등 바이든 정부의 주요 법안이 폐기 혹은 개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도 재계엔 부담이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고 미국으로 들어오는 전기차 배터리 소재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할 전망이다. IRA상 보조금 규모가 얼마나 축소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산업계는 “트럼프가 오기 전 대출·보조금 등 혜택을 받아놓자”는 기조 아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배터리 업계는 미국 에너지부 대출 승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SK온은 포드와의 합작법인 블루오벌SK가 미국 에너지부(DOE)의 대출 지원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 대출 규모는 96억3304만달러(13조8523억원)로 미국의 첨단 기술 차량 제조 대출 프로그램(ATVM) 사상 최대 규모다. 미국 에너지부는 최근 스텔란티스와 삼성SDI의 합작 투자회사 스타플러스 에너지에 75억4000만달러(10조8425억)를 대출하겠다고 밝혔다.
기업들은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해 첨단제조세액공제(AMPC)도 미리 현금화하고 있다. AMPC는 미국 내 청정에너지 부품을 생산한 만큼 수혜를 주는 법안으로,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한화큐셀 등이 혜택을 받고 있다. 한화큐셀은 올해 수취가 예상되는 AMPC 5000~6000억원을 유동화할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도 AMPC를 조기 현금화한다는 방침이다.
◇ 커지는 ‘코리아 패싱’ 우려
기업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좋지 않다. 트럼프 당선 초기만 해도 한국은 유리한 외교적 고지를 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7일 트럼프 당선인이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 조선업의 협조를 요청했을 땐 양국이 상호협력 체계를 굳건히 할 것이란 기대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12·3 불법비상계엄 사태로 양국 간 네트워크에 공백이 생겼다는 평가다. 윤 대통령 대행 신분인 한덕수 국무총리 역할이 아무래도 제한적인 데다, 차기 정부가 들어선 뒤 내각을 구성하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 양국 간 협상 테이블이 열리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관세 증대 카드’를 흔드는 트럼프와 협상하기 위해선 빠른 정국 안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기업들의 각개전투가 펼쳐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미 ‘코리아 패싱’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세계 정상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지만, 아직 한 권한대행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또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 주재 미국 대사에 이어 일본 주재 미국 대사를 지명했지만, 주한 미국 대사는 지명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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