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비밀계좌 등에 수백억 예치···금융소득 20년 간 신고 안 해
과세당국 45억 세금 부과에 행정소송···단순 미신고·과소신고 주장

조양래 한국앤컴퍼니 명예회장. / 사진=연합뉴스
조양래 한국앤컴퍼니 명예회장.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해외에 재산을 은닉하고 금융소득을 신고하지 않아 45억원의 세금을 부과받은 한국앤컴퍼니(한국타이어) 총수 일가가 세무당국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 항소심에서 적극적 재산은닉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세법상 신고를 누락했을 뿐 조세포탈죄가 요구하는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위계 및 그 밖의 부정한 적극적 행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명예회장과 장남 조현식 고문의 대리인은 지난 22일 서울고법 행정11부 심리로 진행된 종합소득세부과처분취소소송 항소심 변론기일에서 PT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대리인들은 단순 미신고나 과소신고는 적극적 은닉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다수의 판례가 존재한다며 적극적 은닉행위를 전제로 한 이 사건 과세처분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먼저 조 명예회장의 대리인은 “납세자가 가명계좌에 법인의 횡령액을 이체한 경우에도 부정행위를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례가 존재한다”며 “원고(조 명예회장)는 본래 무기명인 계좌에 과거에 보유하던 자금을 이체해 얻은 이자 배당 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행위에 불과해 판례보다 경미한 행위로서 부정행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신고는 세법상 협력의무 불이행일 뿐 적극적 은닉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2008년~2009년까지 신고 의무가 없었던 점, 2010~2012년에는 미신고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이 없었던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고문의 대리인 역시 “세법상 단순 미신고는 부정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판시”라며 “원고는 어떠한 불법적인 행위 또는 금융소득을 은닉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를 한 바 없으므로 원고들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고 스스로도 원고를 조세범 처벌법 위반으로 고발할 경우 형사처벌의 어려움을 알고 고발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조 부자(父子)의 적극적 은닉행위 여부와 별개로 10년의 장기부과제척기간 및 부당과소신고가산세 부과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추가 입증이 필요하다며 양측에 서면 보강을 요구하고, 기일 속행을 결정했다. 다음 변론기일은 5월 3일로 예정했다.

조 부자는 1990년부터 스위스 및 룩셈부르크 소재 은행에 단독 및 공동명의로 해외 비밀계좌를 개설해 수백억 원 상당의 현금을 예치한 다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과세관청에 신고하지 않았다. 조 부자는 이 돈으로 가족 명의의 부동산 등을 구매했다. 조 부자는 해외금융계좌 자진신고기간에도 이 계좌에서 발생한 이자소득(35억여원) 및 배당소득액(26억여원)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지방국세청은 2018년 7월~2019년 1월 세무조사를 실시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세무당국은 옛 국세기본법에 따라 10년의 장기부과제척기간 및 부당과소신고가산세 규정을 적용하고 조 명예회장에게 종합소득세 19억8000여만원(2008~2014년 귀속)을, 조 고문에게 26억1000여만원(2010~2016년 귀속)을 각각 경정·고지했다.

1심은 조 부자의 금융소득 미신고 행위가 단순한 과소신고를 넘어 고의적으로 ‘재산의 은닉 또는 소득의 은폐’를 통한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한 부정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각 계좌의 경우 1990년 처음으로 스위스 소재 은행에 개설돼 2016년 3월까지 원고들의 공동명의 또는 단독명의로 4개의 해외은행에 4개의 금융계좌를 추가적으로 개설해 운용됐다”며 “원고들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를 신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고가 금융소득을 파악해 소득세를 부과, 징수하기에 곤란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들은 부자 지간으로서 거래상대방, 사용처, 금액 등에 있어서 스위스 또는 룩셈부르크 현지와의 관련성이 발견되지 않고 조세 회피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해외 소재 은행을 이용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해외계좌 개설 및 이용방식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 각 계좌에서 발생하는 금융소득에 대한 원고들의 적극적 은닉의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해외 계좌에서 달러화로 예치된 자산의 규모, 가족 간 주고받은 금액의 규모가 수백억 원에 이르는 거액인 점, 이러한 자금을 이용해 취득한 해외 소재 부동산 등의 경우에도 그 행방의 파악을 어렵게 하거나 자금의 원천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는 점, 예치된 기간 및 자산규모에 비춰 금융소득의 규모 또한 신고가 필요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점을 당연히 알 수 있었음에도 20년 넘는 기간 신고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할 때 원고들에게 금융소득의 발생과 사용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봄이 합리적이다”고 꼬집기도했다.

그러면서 “원고들이 계좌와 금융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경위와 정도에 비춰볼 때 소득의 은폐를 위한 고의적이고 적극적인 부작위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원고들의 금융소득 미신고 행위는 적극적 은닉의도를 가지고 한 부정행위에 해당하고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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