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 등 핵심 기업도 타깃, 정상 경영활동 방해
해외 이어 토종 펀드 다수 등장···“글로벌 수준 맞는 방어수단 적극 도입 필요”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시사저널e=유호승 기자]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개입은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방해한다. 특히 엘리엇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악랄한 벌처펀드라는 소문까지 돌던 상황으로 삼성의 미래를 고민해야할 중요한 시점에 이들의 개입에 대향해야만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말이다. 그는 2017년 8월 본인의 국정농단 관련 재판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 증언대에 올라 이같이 말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경영진과 이사회를 뒤흔드는 존재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용 회장이 말한 벌처펀드란 경영위기에 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구조조정 등으로 정상화를 시킨 후, 비싼 값에 팔아 단기간에 고수익을 얻는 집단을 뜻한다. 국내에서도 다수의 기업이 외국계 헤지펀드의 타깃이 된 사례가 있고, 이들은 빠른 ‘엑시트(매각)’로 기업경영은 나몰라라 하고 이익 챙기기에 바빴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겨진 기업과 임직원의 몫이었다.

최근에도 많은 헤지펀드가 기업경영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정기 주주총회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과거의 사태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재계 곳곳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삼성과 SK 등 국내 최상위 대기업집단도 글로벌 헤지펀드로부터 정상 경영활동을 방해 받은 바 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당시 삼성은 두 기업의 합병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해, 지배구조 개선 효과를 얻으려 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저평가되면서 합병비율이 타당하지 않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제일모직 주식 0.35주를 삼성물산 1주로 교환하는 방식이었는데, 엘리엇은 경영참가를 목적으로 삼성물산 주식 7.12%를 보유한 상태였다. 단순 계산으로 제일모직 주식 1주가 삼성물산 3주의 가치를 갖게 되는 셈으로, 엘리엇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봤다.

엘리엇은 국민연금에 합병 반대 동참 서한을 보냈고 주주들의 의결권 위임도 요청했다. 법원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결의하기 위한 주주총회를 여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다만 법원은 엘리엇이 제기한 소송을 모두 기각했고, 합병 삼성물산은 같은해 9월 출범했다.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 그래픽=정승아 디자이너

SK도 미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았다. 소버린은 2003년 SK 지분 14.99%를 확보해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했다. 국내 핵심 기업의 경영권이 미국 펀드에 넘어갈 수 있는 위기가 나타난 것이다.

최태원 회장 등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약 1조원을 투입해 지분 추가 확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주가가 오르면서 소버린은 2년여 만에 투자금의 5배에 달하는 1조원을 차익과 배당으로 챙기고 철수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헤지펀드의 목적은 이익 뿐”이라며 “주가를 상승시키거나 기업가치를 높여 매각시 큰 차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투명하고 효율적 경영을 방해하는 기업사냥꾼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엘리엇과 소버린 외에도 헤지펀드의 국내 산업계 공세는 ‘현재진행형’이다. 차이가 있다면 해외가 아닌 ‘토종’ 펀드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광산업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이다. 트러스톤은 태광산업의 2대 주주인데, 최근 기업 경영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배당성향을 20% 올리라고 요구하거나 12조원의 대규모 투자계획에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또 기업경영에 큰 권한을 가지는 이사회 구성마저 위법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기업경영이 힘겨운 상황에 헤지펀드 문제까지 겹치면 사실상 회사 운영이 마비된다”며 “과거부터 수차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만큼 경영권 방어를 위한 강력한 수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토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자산 상위 100대 기업 중에서 8곳만이 정관에 경영방어 조항을 명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헤지펀드 등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전경련은 “해외 기업의 경우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등의 적극적 경영방어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 기업에는 정관에조차 이러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엘리엇이나 소버린 사태가 재현되지 않으려면 정관을 변경하거나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는 방어 수단 확충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