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나서
3.1운동 1주년 옥중 만세시위
“우리 땅에 와서 동포를 수없이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이다”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유관순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유관순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유관순(柳寬順)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자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 시위를 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유관순 선생은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가 친척이 모두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조상에 대한 의무 때문에 혼자서 제사 지내며 전통의 풍습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이나 장남 유우석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막지 않고 아이들을 신식학교에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선생은 이러한 아버지 아래서 조상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를 받아들였고 한편으로 교회에 다니며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1907년 8월 유중권, 유중무 등이 중심이 돼 목천 이동면 교인 82명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애국적 분위기는 선생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관순 선생은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의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화학당에서 선생은 프라이 교장 등으로부터 근대 선진학문을 공부했다. 당시 선생은 “난 잔 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하고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 온 겨레가 힘 합해 3.1운동 전개

당시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우리 민족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승전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기회를 넘길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은 이 기회에 대동단결해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힘을 모아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됐다. 특히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 추진되고, 민족 대연합 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었다.

2월 초순 천도교 측의 요구에 의해 기독교 측의 이승훈이 상경해 연합 전선 형성 문제를 협의했다. 2월 24일 민족독립을 위해 두 종교계는 교단과 종파의 다름을 넘어 연합 전선을 형성할 것에 동의하고 구체적 실행 계획을 세웠다. 또한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韓龍雲)의 노력으로 불교계와 연합도 이뤘다.

학생 대표들도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해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3.1 독립운동 민족대연합전선이 이뤄졌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1000여 매가 인쇄됐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곧 시가지로 물밀듯 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을 확산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줄 것을 요구했고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이어졌다.

◇ 유관순과 학생들 만세시위 동참

유관순 선생도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해 알았다.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김분옥 김희자, 국현숙 등 4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선생 등 서울 지역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1만 여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이들은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의 외침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웠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반포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3월 13일 선생은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해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나서

선생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해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웠다. 4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지령리(용두리)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했다. 또한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의 각 면·각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특히 유림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거사를 하루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하며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했다.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그날 3000여명의 장꾼이 장거리에 모였다. 선생과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면서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 운동이 시작됐다.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했다. 선생을 선두로 3000여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해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했다. 이에 이 날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유관순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든 선생의 어머니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했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달려들어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선생은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제로 가져간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유관순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해 천안헌병대로 압송했다.

◇ 옥중 만세시위 주도···고문으로 순국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했다.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쳤다.

선생은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의지를 보였다. 선생은 공주감옥에서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온 오빠 유우석을 만났다. 유우석은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공주지방법원 재판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밝혔다.

선생은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다.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했다.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선생은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돼 일제에 의해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했다.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다.

10월 12일에서야 선생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 인수했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1운동의 상징으로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 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 돼 민족정기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의 공적으로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가로 서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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