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과 일제 처단
고난의 시간 견디며 독립운동 이어가
일제 회유에 굴하지 않고 순국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석용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이석용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이석용(李錫庸) 선생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에서 국민들과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의병장으로 추대돼 의병들과 함께 일제와 친일파를 처단했다. 이석용과 의병들은 진안읍 공격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선생은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했다. 이후 일제에 체포돼 37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선생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갑술일(甲戌日)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전주다.

일제는 1895년 음력 8월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을 내려 삭발을 강요했다. 이에 선생은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비분강개했다. 그러나 스승인 겸재의 측은한 마음만으로는 군부의 위급함을 구할 수 없으므로 학문 연마에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말에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진했다.

◇ 마이산에서 구국 의병들 일어나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 봉기가 본격화됐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이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태인 의병에 가담하려던 선생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태인 의병이 열흘 만에 해산해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12의사가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선생은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의병을 일으킬 거사를 준비했다. 선생은 자신의 거사로 가족들이 일제 군경으로부터 받을 피해를 우려해 여러 곳에 나눠 피신시켰다.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임실군 상이암(上耳菴)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했으며 사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드디어 선생과 동지들은 1907년 음력 9월 12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석용은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됐다.

선생은 마이산 용암(龍巖) 위에 단을 설치해 거의를 알리는 제사를 주관하며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불렀다. 다음은 격중가의 일부다.

아마도 의병을 일으켜서 왜놈을 쫓아내고

간신을 타살하여 우리 임금 봉안하고 우리 백성 보전하여

삼각산이 숫돌 되고 한강수 띠 되도록 즐기고 놀아보세

우리 대한 만만세

◇ 고난의 시간 견디며 다시 일어서다

이석용 선생은 의병 조직을 결성한 지 하루만인 음력 9월 13일 진안읍을 공격했다. 선생과 의병들은 진안읍 공격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 다음은 ‘정재 이석용 창의일록’에 실린 당시의 상황이다.

'“안읍을 도륙하기 위해 우화정(羽化亭)에 진을 치고 총을 우레와 같이 터뜨리니 왜적이 방금 밥을 먹다가 문득 놀라 몸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외치며 쫓아가서 격전을 벌여 굴구원차랑(堀口源次郞)이 총에 맞아 팔이 부러진 채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복장, 양총, 일본 옥편, 이등(伊藤)이 지급한 직첩, 돈, 지물(紙物) 등을 노획하였는데 거의 20여 짐이나 되었다. 무거워서 옮겨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절반이나 불태웠다. 왜가 고을 원님을 쫓아낸 후 1년 동안 명령을 내린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죽 끈이 수천 건이나 되었다. 나는 읍민들을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원수들이 장차 이것으로 당신의 부모와 처자를 묶어 갈 것이다’ 하니, 군중들이 모두 놀라 다투어 불에 넣었다. 또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전선 100여발을 절단하였다. 일진회를 불러 타일러 스스로 그 깃발을 없애게 하였다.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양민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털끝 만한 물건도 침노치 못하게 했다. 그리고 격문을 만들어 사방에 전달하니 듣고서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선생과 의병들이 용담의 심원사(深源寺)를 거쳐 숭암사(崇巖寺)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인근에서 활동 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가 합진(合陣)을 요청했다. 이에 두 의진은 용담 대벌평(大筏坪)에서 만나 합진을 논의했으나 군사 전략 문제로 갈등을 일으켰다. 합진 여부를 놓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석용 의진은 패했다. 결국 두 의진은 결별하게 됐으며 이석용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함양, 운봉, 인월 등 지리산 자락을 전전했다. 당시 이석용 의진은 군사 20여명과 총기 10여정, 창 4자루가 전부였다.

선생은 1907년 음력 11월 중순 다시 의병을 모으고 군자금을 확보해 의진을 재정비했다. 이후 그는 투쟁 역량을 높이기 위해 전투 능력이 있는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의 성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무렵 이석용 선생이 발표한 ‘의진약속(義陣約束)’ 14개 조 가운데 2개 항이 무기의 성능 개선과 연관돼있다. 선생은 궁장(弓匠), 공장(工匠), 총장(銃匠) 등 한가지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자를 고루 선발해 활용할 것과 우리의 무기는 낡고 위력이 약하니 일제의 무기를 빼앗거나 개량해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의병들은 성능을 향상시킨 화승총을 개발했다.

이석용 선생은 의진의 정비에도 힘썼다. 선생은 ‘의진약속’과 ‘의령10조(義令十條), 1908년 음력 정월 12일’ 등을 발표했다. 그는 ‘의진약속’에서 일본 세력 구축,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 모병, 무기 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 등을 내세웠다. ‘의령10조’에서는 근왕사(勤王事), 정명분(正名分), 안민심(安民心), 족군용(足軍用), 출기계(出器械), 정공상(定功賞) 등을 내걸었다. 특히 선생은 일제 군경을 죽이거나 체포한 의병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생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재개했다. 이들은 친일 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을 처단했으며,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했다. 의병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키고, 국민들에게 가혹한 관리와 의병 배반자들을 처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선생과 의병들은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의 경우 부자들의 자발적 협조를 통해 해결하거나 일제 군경으로부터 빼앗은 노획품, 그리고 면장이나 공전영수원 등이 거둬들인 세금을 빼앗아 충당했다. 선생은 자신들을 후원한 내역을 기록한 ‘불망록(弗忘錄)’을 남겼다. 이 자료는 1908년 음력 9월부터 1913년 음력 7월까지 후원 받은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후원자의 이름과 거주지, 금액, 물품 등이 기록돼 있다. 또한 의병들은 납세 거부 투쟁을 했다.

그러나 이석용 의진의 의병 투쟁은 1909년 어려움에 처했다. 항일 투쟁이 길어짐에 따라 의병의 전력이 약화되고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해 귀순을 권유하며 회유하고 동시에 이들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토벌대를 집중 편성했다. 일본 군경은 선생의 누이를 불법으로 구금·협박하며 이석용의 거처를 파악하려 했다.

일제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자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은 1908년 음력 12월 하순 순창의 모처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일제는 수비대, 헌병대, 경찰 등뿐 아니라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 단체까지 동원해 이석용 등을 체포하기 위해 수시로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일제는 변장대 및 밀정도 투입해 선생을 추적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석용 의진은 강력히 투쟁했으나 어려움이 컸다. 이석용 선생은 3년에 걸친 의병 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했다. 그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

다음은 1909년 봄 당시 이석용 의진의 상황을 전한 기록이다.

대개 우리 의병들은 위에서 권장하는 상이 없고 밖으로는 조그만 지원도 전혀 없는 데다, 훈련과 병기가 불리하여 쇠약하기 그지없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군사일 따름이다. 더욱이 혈전 3년간 적을 격파하여 천하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호남의 모든 땅에 풍운이 크게 일어나 말발굽 소리와 전장터에 흘린 피가 넘쳐날 정도였다. 해와 달은 빛이 없고 귀신의 통곡 소리에도 수심이 어렸다. 나부끼는 깃발은 갈가리 찢기고 보잘 것 없는 무기조차 부러져서 장사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석용)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고하고 신의 힘이 다했으니 다음에 재기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산간에 숨었는데, 이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 - <행장>

◇ “대한의 개가 될지언정 원수의 나라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선생은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생은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이 그것이다. 선생과 동지들은 중국으로 망명해 그곳의 항일 지사들과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석용 선생은 밀맹단을 중심으로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중국 망명을 추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방화상해(放火傷害)·모살(謀殺)·강도 및 강도상인(强盜及强盜傷人)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선생의 11가지 범죄 사실이 적혀 있는데 일본 군경과 전투한 내용은 전혀 없이 친일파 처단과 그 가옥의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이 집중 기술됐다. 일제는 이석용 선생을 의병장이 아닌 잡범으로 대했다.

선생은 재판에서 ▲4서3경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많이 읽었다는 것 ▲빈한한 선비이므로 재산이 없다는 것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 ▲호남창의대장으로서 약 300명을 지휘했다는 것 ▲의병 활동에 대한 사실 여부 등을 답변했다. ‘창의록’과 ‘불망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 창의록은 자신의 충분(忠憤)을 담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었고, 불망록은 거의 이후 후원을 받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과 5역7적을 죽이지 못한 점과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불사르지 못한 점이 유감이라고 최후진술했다. 재판장이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되겠냐고 질문하자 선생은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원수의 나라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사형이 확정된 이석용 선생은 15세의 아들과 최후 면회에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중략) 밭을 가는 여가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해 가문의 명성을 이음이 네 아비의 소원”이라 했다.

선생은 1914년 4월 28일(음력 4월 4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는 대한만세를 세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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