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행간에서
  • 조진혁, 신기호, 이경진 아레나 기자(brandcontents@sisajournal-e.com)
  • 승인 2019.1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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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이라 불리는 세대, 과잉 설비로 비유되는 세대, 1990년대에 태어났을 뿐인 사람들, 소셜 미디어가 탄생할 때성인이 된 그들. 20대 시인들을 만났다.

서윤후

서윤후는 1990년생이다. 그는 종종 이 땅을 벗어나 다른 땅에 간다. 그에게 여행은 자신의 어느 구석을 말끔히 씻는 일이다. 여행 후에는 다시 더러워지는 일을 자처할수 있도록 자신을 잘 정돈하며 지낸다. 서윤후는 시 쓰기를 ‘더욱 미세하게 틈입하는 일’ 이라고 했다. 그는 시를 쓰며 세상의 틈새를 유유히 질주한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두 권의 시집과 산문집 하나를 준비 중이에요. 시 문예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요. 종종 시 쓰기 수업도 진행합니다.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고 있네요.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떤 것은 거절해야 했어요. 거절하면 다시 찾아주지 않을 것 같아 그럴 수 없었어요.

시 쓰기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나요? 수강생들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해요. 혼자 떠들지 않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보죠. 글 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외롭기 때문에 외로운 지점을 읽어주려고 해요.

시 쓰기가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되고 있나요? 육체와 정신으로 저 자신을 구분해요. 두 개의 호주머니처럼 간편하게 생각하고 싶어서요. 먹고사는 일은 회사를 다니는 왼손이 하고, 정신적인 해갈은 오른손이 한다고 생각해요. 먹고사는 일에 큰 도움이 필요했다면 당연히 시는 안 썼을 거예요. 언제부터인가 저를 지배하는 의식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싶었어요.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시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먹고사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 같네요.

최근의 화두는 무엇인가요? 서른입니다.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20대와 30대의 경계에서 잘 다치는 사람이 되었어요. 생각보다 제가 많이 변해서, 20대 동안 관측하고 방어해온 제 자신이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아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서른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회적인 이슈 중에 생각해본다면요? 페미니즘이요. 아직 여전히 부족해서 자기 검열을 자주 해요. 주변을 돌아보기도 하고요. 한 번은 여성 혐오적인 농담이나 여성 비하적인 이야길 자주 하는 친구들과 절교를 했습니다. 제가 잘났고,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고요. 그냥 제가 너무 불편해서요. 불편한 일이 급격히 많아진 때가 서른인 것 같아요. 그중 하나가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예요.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은 뭐예요? 보수요.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했던 제게도 제 안의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새로움만 추구하지 않는 저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그것들을 내심 지켜내고 싶어 하는 악력이 새로운 것을 은근히 밀어낼 때는 당황스러워요. 제 안의 질서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요.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고, 또 그것을 어떻게 허물 수있을지 고민해요.

언제, 무엇을 통해 자신 안에 있던 보수를 마주했나요? 텀블벅이라는 플랫폼을 좋아했거든요. ‘진취적이고 아방가르드한 것들이 다 모여 있구나!’ 하면서 많이 소비했어요. 그런데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된 것을 실제로 받아보면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새로운 것이 무엇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텀블벅을 끊어버렸죠. 혼란스러웠어요. 예전에는 새로운 시도라면 무작정 응원했을 텐데. 나이가 들어 그런가? 하는 거죠. 독립 문예지가 많이 나오잖아요. 저변을 넓히는 데 좋은 역할을 하죠. 그런데 결과물도 좋은가 하면 모두 그렇지는 않아요. 새로운 시도를 응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만들 바에야 안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양가적인 거죠.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최근 지인에게 링크를 보낸 뉴스가 있어요? ‘몰래 의자 뒤로 빼 동료 엉덩방아 찧게 한 60대 벌금형’이라는 기사요. 그 기사 링크를 친한 친구에게 보냈거든요. 답장이 ‘ㅋㅋㅋ’라고 왔어요. 그때의 오묘함, 이기사가 시사하는 이상한 느낌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제가 관심 있는 뉴스는 대부분 랭킹에서 20위권 정도에 있어요.

큰 사건이 아닌,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이슈들인 거죠? 맞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조국 뉴스가 1위부터 30위까지를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왜 시를 쓰나요? 꽉 막혀 움직이지 않는 도로 위에 있을 때 자동차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보면서 약간의 쾌감을 느껴요. 시도 그런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더 미세하게 틈입하는 것. 장황하지 않게 그 틈을 질주하는 것. 아마도 거기에 매력을 느낀 것 같아요. 태초에 시는 제게 ‘백일장에서 빨리 쓰고 집에 가기 좋은 장르’였어요. 백일장에서 처음 시를 썼는데 1등을 했어요. 시를 쓰니 사람들이 좋아해주더라고요. 잘하는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그런 외로움이 있었어요. 시를 쓴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결심을 하지는 않았고요.

동세대의 어떤 것을 시로 쓰기도 하나요? 분노요. 분노한 뒤에 시가 잘 써지는 편이에요. 근 몇년간 분노할 일이 많아 시를 많이 썼죠. 상대가 불분명한 싸움이어서 분노의 영역이 제 영역을 무례하게 침범해요. 그때 잠들어 있던 언어들이 많이 깨어나는 편이죠. 감정적인 분노보다 분노라는 자세를 갖기 위해 노력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를 써요? 마감이 바쁠 때는 퇴근 후 회사 앞 카페로 다시 출근을 해요. 배고파질 때까지만 쓰는 것이 규칙이에요. 글 쓸 때의 체력과 컨디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서 평소에는 주말에 집에서 주로 써요. 마음먹은 날엔 요리를 하다가, 배드민턴을 치다가, 분리수거를 하다가도 계속 시 쓰고 있는 제 모습을 생각해요. 그러면 뭔가 떠오르고요.

시를 쓰기 전 상상했던 시인의 삶은 어땠나요?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 상상했던 사회인의 삶은요? 제 머릿속 시인은 이미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시인의 삶은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잘 상상이 되지 않아서 시인이 된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기대할 수 없었고, 실망할 일도 별로 없어요. 시도 쓰고 회사도 다니는 근면 성실한 사람을 사회인으로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서 아쉬워요. 그래도 제가 재미있거나 돌변할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시에게 달려 있을 것 같아요. 사회인으로서는 절대 불가능이라서요.

20대 독자들이 왜 서윤후의 시를 읽을까요? 동시대의 호흡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이 온도를 실감하는 사이랄까요. 오래 잠영하다 동시에 수면 위로 튀어오르고, 다시 약속한 것처럼 호흡을 참으며 깊은 심해로 들어가는 것. 시를 통해 그런 것을 나눈다고 생각해요. 그 호흡이 갑갑하면 나이를 떠나서 자신에게 맞는 호흡을 찾는 것이고요. 호흡을 통해 다양한 리듬을 갖는 것이, 우리가 문학을 향유하며 만나는 이유 중에 하나라는 생각도 해요.

이제는 쓰지 않으려고 하는 시어가 있나요? ‘마음’과 ‘우리’요. 이제 마음을, 우리를 가볍게 부르는 일은 그만하고 싶어요.

 

문보영

문보영은 1992년생으로 올해 28세다. 그녀는 손편지를 쓴다. 편지 내용은 그녀의 일기다. 힘주어 꾹꾹 눌러 쓴글자들이 종이를 가득 메운다. 일기는 귀여운 스티커들이 붙은 봉투에 담겨 그녀의 소셜 미디어 팔로어들, 정확히는 구독자들에게 전달된다. 문보영은 느끼려고 하면 읽히는 것이 시라고 말했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왜 시를 썼어요? 일상어만으로는 완벽하게 내가 전달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대학생 때 시집을 읽었는데, 이해는 안 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어요. 그게 속 시원해서 그때부터 시가 쓰고 싶었어요.

어떤 시인은 그런 순간 귀신과 대화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저는 시를 쓸 때 평소보다 10배는 더 제정신이에요. 현실을 더욱 진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어요. 시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느끼려고 하면 읽히는 것 같아요.

20대로서 겪는 고민이 있나요?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있어요. 나이가 들면 편해지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타인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모르겠어요. 그룹 활동이나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고 매번 새롭고 적응이 안 되고 혼란스럽고 그래요.

먹고사는 문제는 어때요? 저는 어떤 집단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조직 생활을못 견디기에 프리랜서가 잘 맞아요. 원고료를 받고, 수업도 해요. 가장 좋은 건 일기 딜리버리예요. 일기를 써서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독자에게 전하는 건데요. 지금 제생계를 지탱하고 있어요.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이일이 저에게 엄청 큰 재산이에요.

작가가 팔로어에게 직접 글을 전하는 방식은 기발해요. 출판사가 없는 유통 과정이잖아요. 소셜 미디어 세대답다고 느꼈어요. 이메일로 글을 보내는 서비스가 유행해요. 저는 속이 오래된 사람이라 그런지 텍스트를 읽을 때 전자책보다는 만질 수 있는 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독자에게도 제 글을 이메일이 아닌 우편으로도 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과 마지막 원고는 우편 봉투에 넣어 보냈어요. 글도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편지를 포장하는 반복 작업은 정신노동이 아니어서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해줘요.

시를 발표하는 곳이 왜 문예지여야만 할까요? 확고한 무대가 있는 건 좋아요. 만약 문예지가 없으면다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 SNS를 하거나 아니면 작가가 세상에 소개되지 못할 텐데, 문예지라는 건 기회잖아요. 신인에게 발표 무대가 있다는 건 소중해요. 등단하지 않은 작가들이 폐쇄적으로 배제되는 건 문제죠. 그래서 비등단 작가도 자기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있어야 해요. 저 역시 문예지에만 의존하니까 언제 발표를 못하게 될지 불안한 마음이 있어서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개인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작가의 개인 플랫폼은 굉장히 신선한 시도예요. 처음에는 고민했어요. 작가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신비주의를 유지하는데, 쟤는 왜 저렇게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줄 알았어요. 막상 시작해보니 그냥 특이한걸 한다고 생각해주고, 문예지에서도 관심을 보여요. 예전에는 나서는 걸 싫어하고 작가는 글로만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글도 폐쇄적으로 되는것 같았어요. 골방에 틀어박힌 예술가가 아닌 문을 열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어요.

운동 열심히 하는 시인들도 많던데요? 저는 힙합을 좋아해서 춤을 춰요. 크루도 있어요. 친구들이 무대에도 서고 홍대에서 거리 공연도 해요. 시 쓸 때는 간헐적으로 행복한데 춤출 때는 항상 행복해요.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시는 나를 파는 일 같아요. 나를 깊이 파 먹다 마주하게 되는 나는 그러니까 깊은 내면은 어두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마냥 밝기만 한 시는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죠. 맞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시는 안 읽고 소설이나 비문학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요. 과학이나 철학 서적을 읽고 그다음이 외국 소설, 그다음이 시예요. 제시에는 나라는 화자보다 인물이 세 명 등장해요. 저를 팔아먹다 보면 어두워지고 불행을 호소하게 되고 슬픔을 끌어당기려고 해요. 타인에 대해서 말하고, 타인을 관찰한다고 생각하면서 소설처럼 시를 쓰고 있어요.

우주나 철학 서적에는 시를 쓸 때 도움이 될 용어나 개념이 많죠. 일단 똑똑해지고요. 문학에서는 접하지 못한 문체로 서술돼 있어요. 설명 문체인데도 문학과는 다르죠. 또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가요. 그래서 상상할 여지가 많아요. 계속 생각이 다른 데로 튀는데 잘못 이해해서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내게 돼요.

동세대의 화두를 시에 사용하기도 하나요? 신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며칠 전에 했어요. 사회 문제들을 주제로 뉴스 같은 시를 쓰고 싶어요. 대상에 대해서 제가 가치 판단을 하는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 그현상에 대해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시요.

지금 20대의 화두는 뭐라고 생각해요? 불안이요. 불안과 우울.

불안과 우울은 다른 시대 20대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이 발간된 후로 우울증이 화두가 된 것 같아요. 정신과에 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거죠. 정신과에 다닌다고 해서 낙인 찍지 않고 불안장애나 공황에 대해 열린 사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거 같아요.

시는 언제 어디서 써요? 예전에는 거의 매일 썼는데 너무 정신을 갉아먹어서 요즘은 바짝 쓰고 휴식기를 가져요. 곧 <배틀 그라운드>라는 시집이 나와요. 동명의 게임을 소재로 2~3개월 동안 썼는데, 그 게임은 안 해봤어요. 안 해본 사람도 읽을 수있으려면 제가 경험해선 안 될 것 같았어요. 오빠가 게임할때 관찰하고 물어보고 조사해서 썼죠. 그 게임은 너무 재밌어요. 동그란 원이 언제 어딘가에 생길지 모르는데, 절대 내가 있는 곳에는 안 생겨요. 그 원 안에 들어가는 게문제인데 들어가도 다른 적이 있어요.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전투를 하는 게 고통스러운데 여러 가지로 비유할 수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의식적으로 안 쓰는 시어가 있나요? 자연물이나 우리 고유어, 아무도 모르는 옛날 말, 나도 모르는 말. 제가 안 쓰는 말은 시에 쓰지 않으려고 하죠.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국어사전을 봐요. 가장 쉬운 말인데 막상 쓸 때 안 나오는 말을 알고 싶었어요. 어려운 단어는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니까.

왜 20대가 본인의 시를 읽는다고 생각해요? 우스꽝스러워서 읽는 것 아닐까요. 예전에 박상순 시인이 어두운 시를 쓰더라도 자기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탈출구를 만들어놓는다고 했어요. 저도 그런 기질이 있어요. 절망스러운 순간에 몸 개그를 해서라도 웃고 싶어 하는 절박한 유머 본능이 있거든요. 그게 너무 우울해지는 걸방지해요. 그래서 제가 저에게 계속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20대들도 그 유머를 공감해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

 

최지인

최지인은 1990년생이다. 20대를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다. 20대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준비’에 대해, 더자세히는 ‘밥벌이’에 대해 고민한다. 고민은 시어로, 문장으로 나뉘고, 더해지기를 반복하며 살아서 꿈틀댄다. 시인은 그렇게 잡히지 않는 고민을 하며 요즘을 산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왜 시를 써요? 얼마 전에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질문을 받기 전에는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솔직한 마음을 하나씩 꺼내봤어요. 시를 써서 유명해지고 싶고, 제 작품을 최대한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고, 또 명예욕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시를 쓰는 이유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금 사회에서 ‘시’라는 장르가 감동을 주는 매체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그렇다면 왜 계속 시를 쓰고 있지?’ 이렇게 꼬리잡기하듯이 계속 되물었어요. 지금 내린 결론은 이래요. 시는 내게 ‘숨 쉬는 것과 같으니까’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시를 쓰니까’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행위니까’ ‘시를 쓰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렇게요. 명쾌하진 않아요. 그런데 요즘그 자연스러운 게 잘 안 되네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요. 하하!

시인이 되기 전에는 어떤 고민을 했어요? 고민은 사실, 시인이 되고 나서부터 했어요. 이전에는 딱히 안 했어요. 고민이 없었죠 뭐. 여느 20대처럼.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시인이 된 이후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밥벌이’에 대한 거였어요.

왜 시인이 되고 나서 ‘밥벌이’가 고민됐을까요? 시인이 되기 전에는 나름 사유가 자유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도리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꼭 등단 제도나 정형화된 제도,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도 독립 출판 같은 창구를 통해 얼마든지 제시나 글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막상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그랬던 배경에는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게 맞아요. 저는 꼭 무슨 ‘자격시험’ 치르듯 시를 써서 ‘통과해야지’라는 생각만 했거든요. ‘왜 통과해야 하는지’ ‘왜 반드시 등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거죠. 고민의 폭이 좁았던 것 같아요.

그럼 밥벌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이후, 최지인의 시는 변했나요? 정말 많이 변했어요. 그런데 그 고민이 아니었어도 아마 제 시는 변했을 거예요. 정말 제 시는 1년, 1년이 다르거든요. 등단하기 전, 그리고 현재 직장 생활을 하기 전에는 보통 삶과 죽음, 생사와 관련한 다소 추상적인 주제에 몰두했어요. ‘죽음’이 뭘까, ‘삶’은 뭘까 같은.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해보니까 제가 생각하던 것, 제가 몰두하던 주제보다 힘든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바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어요. 저한테는 정말 힘들었죠. 지금도 역시 힘들고. 그래서 삶에 더 가까운 시를 쓰게 됐어요. 삶 중에서도 ‘일상’에 대해 많이 쓰고요.

그럼 요즘 최지인 시인을 두르고 있는 가장 큰 울타리라면 ‘직장 생활’이겠네요? 그래서 물어보자면,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퇴사’라는 키워드가 유행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어요. 그만큼 시대가 변한 거겠죠. ‘퇴사’라는 개념이 과거에는 ‘뒤처짐’이나 ‘낙오’의 개념으로 인식됐잖아요. ‘용기’ 있는 행동이나 결정이라기보다는 ‘낙오’ 개념으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결코 흠이 아니죠. 그 흐름의 중심에는 1990년대생이 있어요. 시대의 변화는 곧 가치 변화를 야기했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달라진 거죠. 다른 무엇보다 ‘나’라는 주체가 중요해졌으니까. 저는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퇴사’를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그래서일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점에는 경쟁하듯이 자기계발서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자리에 공감서나 위로 서적이 가득해요. ‘위로’나 ‘공감’은 어떻게 보면 지친 상대에게 전하는 거잖아요? 그만큼 현재의 2030세대가 지쳐 있고, 아프고, 약해진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저는 지금 세대를 약자로 바라보진 않아요. 오히려 ‘행복’에 가치를 두고 올바르게 접근하는 요즘 세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20년 전, 30년 전에도 물론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과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알고만’ 있었다면, 현재는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연결하게 된 거죠. ‘행복’을 찾는 이들을 가리켜 몽상가나 이상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결국 자립적이고 바른 가치관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니까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얻는 건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일상’이 시의 주제가 됐다고 했어요. 시어는 어떤 것들일까요? 직장을 다녀서 그런지 시어도 역시 ‘일’이라는 키워드와 많이 연결돼요. ‘노동’ ‘일’ ‘시간’ 같은 것들. 다시 그 안에서 수많은 것들이 파생될 수 있고요. 거기에는 관계도 있을 거고 사랑도 있을 거고…. 계속 넓혀가며 생각하게 돼요. 요즘에는 ‘20대의 일이란 뭘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놀고, 먹는 건 언제쯤 권태로워질까’ ‘일을 하고 산다는 건 과연 뭘까’라는 질문을 특히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그렇게 묻는 과정에서 다시 시로 가져오고 싶은 단어나 문장들이 생겨나겠죠? 맞아요. 요즘에는 사람들에게 호명되지 않는 단어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해요. 오히려 ‘시적이지 않다’라고 이야기하는 단어나 문장들을 많이 써보려고요. 이를테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는 언어나 단어, 그런 문장들을 채집해서 시를 써보기도 하고요. 관계나 대화 속에서 그냥 흘러갈 수 있는 문장을 잡아서 시로 끌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들을 시로 가져와요. 물론 걱정대로 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때, 그 당시에 우리가, 또 그들이 나눈 대화나 목소리는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보다 클 수있으니까요.

그렇게 채집한 문장을 시로 옮겨온 경우가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동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괜찮은 말이 오가면 ‘이거 내가 써도 되냐’고 물어봐요. 툭 나오는 말들인데 가슴에 와닿는 경우가 있거든요. 최근에는 ‘너무 슬프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최백규 시인이 ‘그럼 안 슬플 때까지 슬프면 된다 ㅋㅋㅋㅋ’라고 답장을 보내왔어요.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농담이나 말장난으로 흘릴 수도 있는데, 저는 순간 그 문장이 인상 깊게 다가오더라고요. 결국 그메시지를 시 구절로 옮겨왔어요.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이렇게요.

최지인 시인의 20대는 어땠나요? 다사다난했죠. 그래서 시도 많이 변했죠. 꼭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여기에 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후회보다는 아쉬움이 커요.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요. 이렇게 꼰대가 되는 걸까요? 하하하!

 

홍지호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아닐까. 시를 썼다면, 모든 시간 동안 시인인 걸까? 시인이라는 게 있을까? 시인이 아니라 그냥 시가 있는 것 아닐까. 홍지호는 1990년생이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는게 아니라, 시를 쓰기 때문에 시인’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었고, 들은 순간부터 줄곧그 말을 좋아했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시를 쓰나요? 주로 카페에서 써요. 그곳에 앉아서 음악 들으면서 작업해요. 맥북 열고, 스마트폰 메모장 켜고, 이어폰 끼고, 음악을 고르면서 시작해요. 언제 쓰냐면, 주로 마감을 앞두고 써요. 평소에는 일상에서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해두었다가 어둑어둑해지면 쓰고요.

그 기록은 스마트폰 메모장에 하나요? 스마트폰 메모장에 스케치하고 맥북이나 태블릿 PC로 작업해요. 가끔 손으로 쓸 때도 있어요. 의도적으로요. 타자를 치면 일단 빠르죠. 문자가 흰 여백에서 곧장 생겨나고요. 손으로 쓰면 글을 그리는 느낌이에요. 느리게 써지죠. 안 써지기도 하고요. 리듬도 많이 달라요.

최근에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썼어요? 맥 에이레스와 프랭크 오션이요. 프랭크 오션의 <Blond>를 아직도 무척 좋아해요. 애플 뮤직을 쓰고 있는데, 애플 뮤직의 사용권을 구매한 이유가 프랭크 오션 때문이었어요. 그의 앨범이 애플 뮤직에만 풀렸거든요. 시 쓸 때, 프랭크 오션의 음악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앨범 전체를 돌리면서요.

프랭크 오션의 음악을 많이 듣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프랭크 오션은 지금 가장 새롭고 앞서나가는 아티스트인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음악을 들어보면 과거의 것들이 떠올라요. 무척 단순하고요. 그런 점이 좋아요. 그런데 프랭크 오션이 욱일기 그려진 반다나를 쓴 적이 있어요. 무지해서 그런 거죠. 그때부터 어디 가서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불편해졌어요.

왜 시를 쓰기 시작했나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당시 좋아한 시인이 기형도였어요. 충격을 받았거든요.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문장들을 쓰는 건가 하고요. 사춘기잖아요. 고독한 사람이 멋있어 보이잖아요. 대입을 앞두고 전공 선택할 때 그의 시가 생각났어요. 나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어요. 처음엔 소설이나 시나리오, 희곡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대학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시에 발을 들여서. 이상한 인생이 되어버렸어요.

대학생 때 고민하는 것들 중 하나는 사회인으로서의 삶이잖아요. 대학교 입학 후 시에 발을 들였다면, 그당시에는 등단이 목표였나요? 등단이 목표였던 적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처럼 쓰고 싶다는 것뿐. 굉장히 안일하고 건방진 생각이었죠. 등단은 실제로 제가 어딘가에 글을 투고하던 무렵에 한번 생각해본 정도죠. 이젠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거든요. 정말 바보 같았어요. 한국에서는 등단을 해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건데.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기 때문인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먹고살 거라 생각했고요. 뭐에 꽂히면 그것만 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못 돌려요. 그래서 시만 봤나 봐요. 시 혹은 문화. 아, 음악도요. 음악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즐겨서.

음악 작업도 하고 있나요? 음악 매일 만들어요. 카페에서 글 쓰다가 막힐 때면 음악을 만듭니다. 맥북 로직으로요. 그냥 취미로 꾸준히, 패드와 시퀀스들로 작업하고 있어요. 음악 만드는 시간이 저에겐 쉬는 시간이에요. 음악 만들고 있으면 편안하고 기분 좋아져요. 음악을 듣고 영감받아서 시를 쓸 때도 많아요. 거의 늘 듣고 있으니까.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시인이 되기 전 상상했던 시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시인이라 하면 술 많이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지금의 시인은 어디든 많이 가보고, 뭐든 많이 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요즘 사람들에게 읽히는 시를 쓸 수 있어요. 책이라는 게 끝까지 읽기 전에 포기하기 쉽잖아요. 끝까지 읽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읽는 사람이 많은 걸느낄 수 있도록 해야겠죠. 원래 저는 집 밖, 여행, 낯선 곳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제는 나가서 많이 느끼고 보려고 노력해요. 최근에는 전시장도 즐겨 찾고 있어요.

최근 인상 깊었던 전시는 뭐예요? 국립현대미술관의 박서보 전시회요. 압도되었어요. 반복되는 패턴이나 색을 활용하는 건, 얼핏 생각하면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업이잖아요. 그러나 그걸 아주잘 다루는 마스터가 창작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제 시도 그럴 수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인이 되어보니 상상했던 것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요? 저는 스스로 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요. 시인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한 편 쓰는 당시에만 시인이 있는 거라고요. 시를 쓴 다음, 모든 시간 동안 계속 그 사람이 시인인 걸까요? 물론 시로 생계를 이어간다면 달리 얘기할 수있겠죠. 시인이 직업이 되는 거니까.

지금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까’가 1번이에요. 2번은 올 연말쯤 첫 번째 개인 시집이 나올 텐데, 이 다음 시집은 어떤 방식으로 묶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첫 시집은 나름의 방향성을 잡아서 묶었는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해볼까. 지금까지 썼던 방식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지겨워졌거든요. 즐겁게 쓸 수있는 새 형식과 방향을 고민하고 있어요.

최근 댓글을 달거나, 지인에게 링크를 보낸 뉴스가 있다면요? 댓글 달기나 링크 보내기는 잘 하지 않아요.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 기사에는 댓글을 달아봤어요.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널 팬이거든요. 아스널 팬 카페에, 경기 분석 글 같은 건 남긴 적 있어요.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사회적인 이슈가 있나요? 여름에 환경 관련 세미나가 있었어요. 환경 단체와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죠. 그 이후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져 뭔가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홍지호의 20대 독자들은 왜 홍지호의 시를 읽을까요? 개인 시집이 아직 발간되지 않았어요. 저를 찾아보고 제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감이 잘 안 와요. 저는 그냥 내 자리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써요. 제시를 읽는 독자는 제가 만든 자리를 보고, 와서, 마음에 들어 잠시 앉았다 가는 분들이겠죠.

시인이기에 하는 일이 있어요? 없어요. 저는 그냥 생활인이고 싶어요. 생활인으로서 살다가 잠깐 시를 쓰고 싶습니다.

쓰지 않으려고 하는 시어가 있나요? 쓰지 못하는 시어들만 많아요. 어떤 단어는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제쳐두기도 하는데, 그런 것까지 다 쓰고 싶어요.

제쳐둔 단어에는 어떤 게 있어요? ‘힙합’이요. 힙합 같은 단어들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육호수

‘시인에게 20대는 있을 수있는데, 20대 시인이라는 말은 없지 않을까요?’라고 되묻는 육호수를 구태여 시간 곁으로 끌고 가서 꼭 키를 재듯 세워보면, 그는 1991년생, 올해로 29세다. 시인은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매번 끝을 밀고 나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힘들게 밀고 나간 지점에서 비로소 문장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20대의 막막함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시인은 다시 물어왔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육호수 시인의 20대는 어떤 모습이었어요? 여러 모습이었죠. 매번 그때의 ‘나’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어요. 벗어나고 싶었죠. 견딜 수 없는 모습이 많았던 탓이에요. 그래서 시를 쓰기 전에는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타인이라든지, 공포라든지. 또 죽음이라든지 이런 것들에게. 꼭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같았죠. 그런데 시를 쓰면서 알게 됐어요. 쫓는 사람도 쫓기는 사람도 ‘나’고, 공포도 내가 만든 것임을. 그 사실을 깨닫고 시를 쓴것 같아요. 이제는 더 도망칠 곳도 없으니까. 도망쳐서 닿은 곳이 여기니까. 결국 시니까.

육호수 시인의 말대로라면 ‘시’는 지나온 시간이잖아요. 그럼 경험인데, 시는 결국 타인의 경험을 헤아리는 일일까요? 어떤 시의 문장들은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만 보여요. 그 시간을 지나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냥 글씨일 뿐이죠.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겪고 있는 사람, 혹은 지나온 사람들에게만 닿는 문장들이 있어요. 그 문장이 가서 박히면, 보이면, 시를 읽는 거죠. 시간과 시간이 만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한테는 최승자 시인이 그랬어요. 저도 그런 시를 쓰고 싶어요.

그때 만난 최승자 시인의 시처럼, 지금의 20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가 있다면요? 반장선거 투표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아서 한 표 차이로 떨어졌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 시를 추천하고 싶어요. 20대뿐만 아니라 ‘여남소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류, 그리고 유사 인류, 언어를 가진 외계의 존재들, 혹시 있을지 모를 창조신에게 제 시를 추천하고 싶어요. 좋은 시집은 두 권씩 사두면 더 좋아요.

20대의 어떤 화두를 시로 가져오고 싶어요? 저는 세대를 생각할 만큼 넓은 시각으로 살아오지 않았어요. ‘어떤 세대나 사상에 속해 있다’는 의식도 없고요. 게다가 시의 바깥에 있는 화두나 나름의 깨달음을 담은 시들은 거의 실패했죠. 만약 20대라는 주제로 가져오고 싶은 화두가 발생한다면, 그건 시 안의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진 다음의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역시 시를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기둥으로 그곳에 있을 뿐일 테죠. 그래서 모르겠어요.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럼 반대로, 20대가 육호수의 시를 읽는 이유를 생각해본다면요. 제 시는 20대뿐만 아니라 30대도, 40대도 그리고 10대도 읽고 있어요. 1952년생의 어떤 시인께서도 제 시가 좋다며 필사했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러니까 세대와는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제 문장이 ‘읽히기’ 때문에 저의 시를 읽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시가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멀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 곁에, 한두 발 앞에 있는 걸 보기 어려운 정도일 뿐이죠.

20대는 어떤 시간이라고 생각하나요? 20대는 시간일까?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구획해 강요되는 ‘외적 자아’인 것 같아요. 그것을 자신의 ‘내적 자아’라고 착각하는 순간, 정말로 20대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20대’는 없다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으로 30대도, 50대도, 80대도 마찬가지죠. 저는 20대를 어떤 시간으로 한정하고 싶지 않아요.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그럼 20대를 시간으로 보지 말고, ‘젊음’으로 바라봤을 때떠오르는 시어가 있다면요? ‘요절’ ‘선언’ 같은 단어들이 생각나네요. 이유라면 시인에 대한 환상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요절한’ 시인에게는더 이상한 환상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물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겠지만, 이른바 ‘요절한 시인’에게 부러운 건있어요. 그들은 초기 시에서 저질렀던 ‘선언’을 물려야 하는 시간을, 이전에 발간한 시집 속의 자신을 배반하고, 죽이고 달아나야 하는 지리멸렬한 시간을 면했으니까요. 어떤 연유로든 백지 위에 시어가 발생했다면, 그 시가 가진 어떤 인력이 선별적으로 그 시어에 작용했다는 것이고, 다시 시어는 발생한 즉시 그 시에서 어떤 작용을 하게 되죠. 그 작용이 해당 시에서 유효한지, 아닌지는 초고를 쓰고 퇴고를 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 미적 취향에 맞춰서 시어를 빼거나 다듬거나 하지는 않아요.

요즘 시는 어디에서 소개되고 읽힐까요? 시가 놓이는 곳이꼭 시집이어야만 할까요? 시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이는 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시를 찾는 곳에서 읽힌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시가 많이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시가 읽히지 않는 건 아니죠.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요.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갈 수 있어요>의 첫 장에도 썼지만, 저는 ‘새를 만난 적없는 새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써요. 이 시를 정말로 읽어줄 누군가에게. 예를 들어 저는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전시된 시를 볼 때면 정말 피로해져요. 옆집에 사는 누군가가 코인 노래방에서 부르는 무작위의 노래들을 지하철을 기다리는 내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이해될까요. 시는 ‘적막’을 매개로 시간과 시간을 통해 작용하죠. 그런데 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가장 피로한 출퇴근 시간에, 거기다 사람과 사람에 치여서 몸 가누기 힘든 공간에서, 무작위의 시들을 전시해놓는 건 ‘소음’이고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요즘에는 복합 문화 공간에서 시인과 독자가 만나 함께 시를 읽는 시간을 나누거나, ‘시’와 ‘공간’을 잇는 전시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함께하고 싶고, 응원하는 마음이에요. 저는 시가 시집의 형태일 필요도 없고, 활자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시를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전부 다를 것 같아요. 제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저는 시와 함께였기 때문에 지날 수 있었던 시간을 겪었어요. 그래서 시가 가진 힘을 믿어요. 그런데 또 시가 제게 즐거움을 주진 않아요. 시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시간은 고통스럽거든요. 쓰는 동안에도, 퇴고하는 과정도 고통스럽고요. 초고를쓴 날에는 손발에 땀이 나고 귓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 잠을 잘 못 자요. 시를 읽는 시간 역시 즐겁지 않죠. 그 시인의 시간과 세계 속으로 진입해야 하고, 그 사람의 이미지들을 감각해야 하고, 또 성큼성큼 도약하는 사유들을 따라가야 하니까요.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은 대부분 시의 행간에 낭떠러지도 많고, 칼도 많아요. 혹시 케이크 속에 숨겨둔 유리 조각은 없는지, 긴장하며 읽게 되죠. 하지만 그럼에도 시를 읽는 이유라면, 시를 통해서만 견디게 되는 지리멸렬한 시간들이 있으니까요. 시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시간들이 있는 거죠. 저는 여러 번, 오래 살고 싶어요. 시를 읽고 쓰면 그럴 수있다고 믿어요. 믿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남은 선택지가 이것뿐인데.

 

양안다

양안다는 28세다. 대학원을 수료했고, 지난해 가을 시집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를 발표했다. 양안다는 서울에 있는 자취방에서 시를 쓴다. 보통은 이른 아침. 하지만 그의 방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양안다는 암막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RGB 컬러가 변하는 LED 조명에 의지한 채 박하사탕을 먹으며 시를 쓴다.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뭔가요? 대학에서 처음에는 소설을 썼어요. 문학 공부하는 선배들이 자꾸 시가 문학의 기초라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어서 선배들보다 시를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를 썼는데 재미있어서 그냥 시를 쓰게 됐어요.

20대라서 겪는 고민이 있나요? 없는 것 같아요. 먹고사는 고민이야 당연하지만 그건 나이 들어서도 하는 고민이고, 사실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성격이에요. 무던하달까? 어떻게 보면 둔감하기도 하고. 좋은 일에도 유난 떨지 않고, 나쁜 일에도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취업 스트레스는 없나요? 아직 스트레스를 안 받는 이유는 제가 현재 (병역) 미필입니다. 게다가 대학원을 수료한 상태라 일하기 어려운 시기예요. 또래의 고민과 조금 동떨어져 있어요.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나요? 원고료가 있고, 가끔 수업 제안이 들어오기도 해요. 낭독회 출연료도 있고요. 큰돈은 아니죠. 문학 행사 스태프로 자주 일했어요. 불러주면 가서 의자 옮기고 무대 동선 안내하는 일이요. 그렇게 일해서 번 돈은 용돈으로 썼어요.

퇴근하면 하루가 다 지나서 힘도 부친데, 시인들은 집에 돌아가서 시를 써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날까요? 전업 시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제게 시를 쓴다는 행위는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수도 있죠. 시 쓰기는 그것들과 동일선상에 있어요. 시 쓰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 젊은 시인들은 시를 게임에 많이 비유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시가 게임처럼 재미있어서 써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가요? 젊은 시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예전처럼 시를 신성시하는 느낌이 없어요. 시를 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유희로 생각하는 시인들이 많아요. 물론 그게 정답은 아니지만.

순수 예술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도 늘어난 것같아요. 더 이상 순수 예술이라는 말도 잘 사용하지 않고. 그래도 아직 시는 어려워해요. 다른 분야의 친구들은 제시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요.저 역시 다른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데 지식이나 감각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요. 물론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창작을 하다 보니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순수 예술은 아직 존재하는 것 같아요. 뭐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어렵다고 느낄 만한 부분은 확실히 있어요. 또 다양해야 재미있는 것도 같고.

왜 시를 발표해야 하는 곳은 기존의 문단이어야만 할까요? 제가 등단하기 전까지는 비등단 작가들이 활동하는 SNS 플랫폼이 없었어요. 지금은 비등단 시인이나 작가들이 활동하는 플랫폼이 다양해졌죠. 그런 움직임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길이 많아지고,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쳤던 것이 분산되고, 여러 방향으로 넓게 퍼져나간다는 점에서요. 또래 시인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생각하리라고 봐요. 그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등단 제도가 소수 인원에게 심사를 받는 것이 문제인데, 잡지를 통해 발표된다는 것도 소수 인원의 심사를 거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에요. 사실상 비슷한 구조라는 뜻이죠. 하지만 기존 방법이 싫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러 플랫폼이 생기는 과정은 기존 방식이 싫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하는 움직임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겨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사진=김선익
사진=김선익

 

등단은 전문가가 신예를 발굴하는 시스템이에요. 권위 있는 전문가에게 권력이 있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텍스트를 다루고 소통하는 공간은 SNS예요. 권력은 희미하죠. SNS에 익숙한 세대는 권위보다 많은 조회가 더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시 역시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끼기도 해요. 우리끼리 모임을 만들고 서로 시도 보여주고 하면서 장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여러 장들이 생겨나요. 물론 재미있게 운영되는 모임도 있고, 뚜렷한 방향을 내세워 연대하거나 지지하는 모임도 있어요. 기존 플랫폼에서는 여러 이유로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울타리 밖에서는 자유롭게 다양한 시도를 한다는 점이 중요해요.

시에 쓰고 싶은 동세대의 화두가 있나요? 수동적인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요. 할 말을 제대로 못하고 눈치 보는 사람들이요. 기분이 울적해도 억지로 웃거나, 모임에서 밉보이지 않게 처신하거나, 분위기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거나. 그렇게 눈치 봐야 해서 우울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시에 많이 썼어요. 그런 생각은 민음사 시집을 낼 때부터 했어요.

언제 어디서 시를 써요? 주로 자취방에서 쓰죠. 아침에 쓸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요. 자취방을 시 쓰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놨어요. 저는 집중하면 손톱을 물어뜯어요. 그래서 시를 쓸 때엄지에 반지를 하나 껴요. 그럼 반지를 씹게 되더라고요. 박하사탕을 좋아해서 잔뜩 쌓아놔요. 또 어두운 걸 선호해서 암막 커튼도 쳐놨어요. 그리고 LED 조명을 켜요. 붉은색에서 보라색까지 변화되는 막대 형태의 조명이요. 전에는 미러볼을 썼는데, 조명 바가 더 좋더라고요. 집아니어도 그저 제가 편안한 장소면 크게 상관하지 않아요.

의식적으로 피하는 시어나 주제도 있어요? 쓰고 나서 지우는 단어가 있어요. 기술 발전에 관련된 용어나 과학 관련 용어요. 다른 시인의 시에서 로봇 관련 용어를 본 적 있어요. 그때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는데, 제시에 그런 단어를 쓰면 멈칫하게 돼요. 다른 시인들 시에서본 적이 있거든요. 이상하지 않았어요. 근데 제가 쓰면 지우게 돼요. 양자물리학, 빅뱅, 블랙홀 이런 것들이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를 안 쓰는 거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도 시에서 본적 있어요. 너무 좋았어요. 제가 쓰려고 상상을 해보니까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어요.

왜 20대들이 양안다의 시를 읽는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하면 시집을 내서 읽는 것 같아요. DM으로 잘읽었다고 연락 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주로 제 시의 정서를 우울하게 느끼는 분들이 따로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우울해서 좋아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최근에 SNS에서 제 이름을 검색하다 제 시를 읽으면 자살하고 싶어진다는 글을 봤어요. 무척 좋았어요. 좋아하는 영화나 책을 봤을 때 진짜 죽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어요. 우울해서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한테도 좋은 감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0대가 안다 씨의 우울함에 동조하나 봐요? 모르겠어요. 제 시가 우울한지 아닌지는 제가 느끼는 게 아니라 독자가 느끼는 감정이니까.

 

아레나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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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신기호, 이경진  PHOTOGRAPHY 김선익

조진혁, 신기호, 이경진 아레나 기자
조진혁, 신기호, 이경진 아레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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