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지역 임시정부 격’ 대한국민의회 의장 맡아 ‘독립선언서’ 발표
재력가로서 연해주 지역 교육, 민족언론 발전 기여

문창범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문창범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2019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이어 그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일제 강점기 러시아 지역의 한인사회 대통령으로 불린 문창범 선생은 이 지역에서 3·1운동을 이끌었다.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회 의장을 맡아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재력가로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교육과 민족언론 발전에도 기여했다.

국가보훈처와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문창범 선생은 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 유덕면 죽기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인 1877년경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 쁘질로프카(육성촌) 마을로 이주했다. 선생은 중국과 한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살면서 러시아 군대 납품업자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문 선생은 재력가로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교육, 민족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구한말 최초 간행된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기사에 따르면 문 선생은 리포어 명동학교의 찬성원으로, 우수리스크 영안평(시넬리니코보) 동흥학교 설립 등에 기여했다.

문 선생은 해조신문이 일제 탄압으로 1908년 5월 26일 폐간되자, 유진률, 차석보 등과 제2의 해조신문인 ‘대동공보’ 발간에 기여했다. 대동공보 발간이 러시아 연해주 정부로부터 허가되자 문 선생은 1908년 8월 15일 제1차 발기인 총회에 참석해 간행을 지지했다.

◇ 권업회 통해 독립운동 참여,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문 선생은 권업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 독립운동 방략을 고민했다. 이에 20만명에 가까운 대규모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했다. 권업회는 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니콜라예프스크·이만 등 지회를 설치했다.

권업회의 목적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 과제를 결합해 최종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문 선생은 1913년 6월 30일 하반기 정기총회에 우수리스크지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1914년 1월에는 우수리스크지회의 의원 겸 교육부장으로 선출됐다. 선생은 독립운동가 이갑의 신병치료비 청구서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문 선생은 만주 길림에서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에 만주・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중심인물 39명과 함께 서명했다.

◇ 대한국민의회 의장 맡아 ‘독립선언서’ 발표

1917년 2월 러시아혁명 발발 후 한인들은 한인사회 결집을 위해 대규모 회의를 소집했다. 러시아령 한인 사회의 자치적 대표기관을 만들려는 회의였다. 문창범 선생은 최재형 등과 함께 9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전로한족회중앙총회라는 상설적 중앙기관을 조직했다.

1919년 2월 25일 니코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 간도 및 국내의 대표들이 모여 전로국내조선인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독립선언서 작성과 발표, 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방략 수립, 이를 추진할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 것들을 의논했다. 이 회의에서 문창범 선생은 김치보, 김하석, 장기영 등과 함께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발기했다.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대한국민의회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조직은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이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장에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인 문창범을 선출했다. 러시아령 한인들은 문창범을 대통령으로 부르기도 했다.

◇ 러시아 지역서 3·1운동 이끌다

국내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러시아 지역에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선생은 니코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했다.

문 선생은 특히 니코리스크 코르사코프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했다. 당일 한인 2명이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명의의 러시아어, 한글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전해달라는 요청서를 첨부해 일본영사관에 전달했다. 동시에 러시아 관청과 11개국 영사관에도 선언서를 배부했다.

독립선언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돼 있었다. 독립선언서는 “오인(吾人)은 2000만의 조선국민의 명(名)의 하에 그 완전한 주권이 하등의 제한 없이 부흥되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 모국에서의 독립과 주권과 재보(財寶)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고 했다.

정부 당국자 이름으로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이 독립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의 간부명의로 된 ‘독립승인요구서’였다.

이날 오후 4시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했다.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 선생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렸다. 이에 일본총영사는 러시아요새사령관과 연해주 장관에게 문창범 선생의 체포와 한인의 시위운동 금지를 요구했다.

문창범 선생의 사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상해에서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고 1938년 러시아에서 옥사했다는 설도 있다.

정부는 1990년 문창범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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