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판결-상고법원 거래 논의·단독판사회의 의장 경선 개입 정황 등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차량에 오르기 전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사진=뉴스1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사무’라는 본래 업무를 넘어 부적절한 ‘정치’ 활동을 펼친 정황이 드러났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재판과 상고법원 설립을 결부 지으려 한 정황,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판사회의 의장 경선에 특정 판사를 지원한 정황 등이 확인됐다.

사법행정기관이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 원세훈 판결 두고 BH와 대법원 최대현안 ‘거래’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22일 법원 내부 통신망인 코트넷에 이 같은 내용을 공개했다.

추가조사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원 전 원장의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에 걸쳐 청와대와 정치권, 언론, 법원 내·외부 동향과 반응을 파악해 정리하고 향후 대응방안을 검토했다.

추가조사위가 확보한 법원행정처 내부 문서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원 전 원장의 항소심 결과가 ‘청와대의 최대 관심 현안’이라며 ‘선고 전 항소기각을 기대하면서 (청와대가)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법원행정처에 전망을 문의했다’고 정리했다.

이 문서에는 또 원 전 원장이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우병우 민정수석이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했다’고 기재됐다.

특히 법원행정처는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고 청와대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발상을 전환해 (상고법원과 관련) 대법원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도 있다’면서 정무적 대응 방향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는 ‘(원 전 원장의)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라며 판결과 대법원 최대 현안을 이른바 ‘거래’하려 한 정황도 파악됐다.

이후 원 전 원장의 사건은 2015년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만장일치로 대선 개입 혐의가 무죄로 파기환송 됐다. 법원이 2년 넘게 끌고 온 이 사건은 지난해 8월에서야 원 전 국정원장의 선거·정치 개입을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4년이 선고됐다.

◆ 단독 판사 회의 의장 경선 개입 정황…선거전략까지 구상

법원행정처가 판사회의 의장 선출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다.

법원행정처는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의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를 견제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문서는 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판사회의는 법원조직법에 규정된 공식적인 사법행정 자문기관으로 2016년 당시 의장 후보로 A 판사가 나왔다. 법원행정처는 A판사에 대한 동향을 분석했을 뿐 아니라, ‘대항마’를 언급하며 선거전략까지 구성했다.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A판사의 출마와 관련해 ‘A판사가 의장으로 선출될 경우 예상되는 문제점’을 정리했다.

해당 문서에는 ‘단독판사 회의로 법원행정처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음’ ‘서울중앙지법 사무분담에 관한 지침 개정을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음’ ‘법원장의 권한에 속하는 각종 사법행정적 조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가능성이 높음’이라고 기재돼 있다.

법원행정처는 A판사의 대항마로 B판사를 적극 지원해야한다고 계획했다. 법원행정처는 ‘B판사가 의장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함으로써 핵심 그룹의 지원을 받는 A판사의 당선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노골적인 선거개입 의사를 밝혔다.

구체적인 지원 방법으로는 ‘단독판사의 복지 및 실질적인 지위향상’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등 사법행정라인과 단독판사 사이의 실질적인 가교 역할 수행’ 등 선거공약 아이템도 발굴했다.

특히 ‘경선 당일 B판사를 추천하고지지 발언할 판사를 섭외’ ‘B판사를 지지할만한 단독판사들이 가급적 회의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독려’ 등의 계획을 짰다.

◆ 추가조사위 “실행 여부 확인 못해…부적절한 사법행정권 행사”

추가조사위는 법관의 동향이나 성향 등을 파악한 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히면서도 ‘대응 방안 등이 실제로 실행됐는지 여부’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 실행 과정에 관여했는지 여부’ 등은 추가 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 및 범위를 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법원행정처가 부적절한 사법행정권을 행사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원세훈 전 원장의 사건과 관련해 추가조사위는 “판결 선고 전에는 외부기관의 문의에 따라 담당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파악하여 알려주려 했다는 정황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사법행정권이 재판에 관여하거나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노회찬 정의당 의원 역시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을 미끼로 상고법원 설치문제를 청와대와 거래하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사법행정기관인 법원행정처가 오히려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재판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반헌법적 행태를 저질렀다”고 꼬집었다.

추가조사위는 또 단독판사회의 의장 경선 개입과 관련해서 “법원행정처가 특정 법원의 판사회의 의장 경선과 관련해 출마 예정자의 신상 정보를 확인하는 선을 넘어 다른 판사의 의장 경선 지원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대응 방안의 성공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부적절한 사법행정권의 행사”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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