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D 노동자 업무-질병 상당인과관계 첫 인정…유사 사건 영향 미칠듯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햇빛이 비치고 있다. 2017.8.22 / 사진=뉴스1

 

대법원이 직업병 산업재해 사건에서 업무와 질병 사이 상당인과관계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유해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직업병 사건에서 피해자의 증명책임을 완화한 전향적 판결이라는 평가다.

 

다만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된 행정소송이라는 점에서 당장 삼성전자​가 받게 될 직접적인 불이익은 없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산업의 안정성을 확신하는 입장이다.


◆ 삼성 LCD 노동자 희소병 산재 인정…“증명책임 완화”

이희진씨(33)는 2002년 11월 18살의 어린 나이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는 학교의 추천으로 천안에 위치한 액정디스플레이(LCD)공장에 들어갔다. LCD 모듈 검사과에 소속된 이씨는 ‘LCD 패널 화질 검사원’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았다.

사업장은 모듈 공정 전체가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구조였다. 부품조립 과정에서 납땜이 이뤄졌고, 조립 후에는 LCD 패널을 고온에서 가열해 성능과 내구성을 검사하는 에이징(ageing)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이씨는 에이징이 끝나면 불량품을 눈으로 확인했다. 조립된 15~19인치 규격의 LCD 패널에 전원을 연결한 다음 손으로 제품을 들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색상과 패턴에 불량이 없는지 파악하려면 최대한 눈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관찰해야 했다. 

 

이렇게 검사하는 LCD 패널은 시간당 70~80개에 달했다. 하루 3~4번은 이소프로필알코올(IPA) 이라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LCD 패널이나 팔레트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기도 했다. 작업장 내 어느 하나의 세부공정에서 유해 화학물질이 발생하더라도 별도로 여과되거나 배출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초과근무는 다반사였다. 3조 2교대(1일 12시간 근무) 또는 4조 3교대(1일 8시간 근무)가 원칙이었지만, 교대시간 전후로 초과근무는 불가피했다. 쉬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LCD 패널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이동되는 탓에 작업량과 속도를 조절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은 40분에 불과했다. 혹여나 불량 제품이 발생해 사유서를 제출할까 긴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연속되는 나날이었다. 이씨는 이곳에서 4년 3개월을 근무했다.

이씨는 입사 1년이 돼서야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오른쪽 눈 시력이 감퇴하고 팔다리가 저려왔다. 증상은 악화하더니 결국 2007년 2월 오른손과 다리에 마비증세가 왔고 시력을 잃었다. 그는 퇴사를 결정했다. 

 

한 달 만에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은 ‘뇌경색’ 이었다. 이듬해 6월 큰 병원을 찾은 그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확진 판정을 받는다. 의사는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한 시점이 이씨가 21살인 2005년 무렵이고 이는 우리나라 평균 발병연령보다 훨씬 이르다는 소견을 냈다.

이씨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뚜렷한 치료제가 없어 증상만 지연시켜주는 진행억제제를 이틀에 한 번 씩 투약했다. 조금만 피곤해도 증상이 악화됐다. 치료비나 생활비도 부족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2010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요양급여 신청했지만 이듬해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산업 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 ‘발병과 업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연구원은 이씨가 열악한 작업조건에서 신체적·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순 있지만, 질병과 업무 사이의 관련성을 판단할 만한 충분한 의학적 검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법원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1·2심 모두 “발병 원인 물질에 일정 기간 노출됐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개연성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며 공단 측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유해 화학물질로 인한 발병연구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질환과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의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또 개별 유해요인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대법원은 유해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직업병의 경우 ‘상당인과관계 증명책임을 완화한다’는 법리가 확립돼 있다는 부분도 지적했다.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증명해야 하지만, 그 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밖에 역학조사 방식 자체의 한계, 삼성전자가 유해 화학물질 등에 관한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면서 공개를 거부하는 등 사업주의 협조거부,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 부분도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9일 삼성전자 LCD 천안공장에서 4년3개월간 근무하다 희소질환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이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 불승인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소송을 제기한지 7년 만의 성과였다. 판결 이후 이씨는 “7년이나 기다리느라 지치고 힘들었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됐다”면서 “다른 피해자분들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고 산재가 인정되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삼성에 대해서도 “더 지체하지 말고, 제대로 보상해서 아픈 사람들이 힘들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잇따른 노동자 승소 판결…삼성전자 법적 책임은 아직

이번 판결은 대법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 첫 사례지만, 하급심에서도 유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LCD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김모씨에 대해 요양급여를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김씨는 항소심에서도 승소했고, 공단이 상고하지 않아 원고 승소가 확정됐다. 지난 5월에는 서울고법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모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대법원의 전향적인 판단은 현재 진행 중인 유사 사건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전망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를 표방한 시민단체 ‘반올림’에 따르면 2007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 측의 유족급여신청 사건 이후 지난 5월까지 총 85명이 산재신청을 내 이 중 21명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된 병명은 8가지로 난소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경화증, 유방암, 뇌종양, 다발성신경병증, 악성림프종 등이다.

반올림에 제보된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는 지난 5월 기준 총 383건에 이른다.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 등 DS 부분의 피해 제보가 23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 밖에 휴대폰, TV브라운관 제조 검수 과정에서도 질병이 발생했다고 반올림은 주장한다. 제보자 중 141명은 이미 숨을 거뒀다.

피해가 접수된 사업장으로는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테크원(현 한화테크윈) 등 삼성 계열이 가장 많다. 비 삼성 계열 회사로는 하이닉스, 매그나칩, ATK, 페어차일드, 서울반도체, LG디스플레이, LG전자 등이 있다. 직업병 피해를 유발한 것으로 추측되는 일부 공정은 중국 등 해외로 이전됐지만, 잠정적 피해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반올림을 돕고 있는 이종란 노무사는 “국내 반도체 클린룸에서는 극저주파나 전리방사선 등 현대과학이 모두 파악하지 못한 유해요소들과 유해 화학물질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고온·고압을 받는 물질들이 어떠한 성질변화를 일으키고 제3의 유해성 물질을 만들어 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삼성전자 등은 클린룸의 안전성을 확신하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측은 2015년 10월 배포한 자료에서 “반도체 산업은 최첨단 제조업으로 어떤 업종보다 안전하다”면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라인의 안정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2월 외신 간담회에서는 삼성이 대한민국에서 갖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직업병 문제가 발생한다는 취지로 주장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 산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적 부조’라는 차원에서 피해자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15년 7월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라 1000억원의 사내 기금을 조성하고 희소병으로 퇴직한 근로자에 보상과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까지 약 120여명에게 보상액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반면 반올림 측은 삼성전자가 조정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공익법인이 아닌 자체보상기구를 만든데 반발한다. LG디스플레이가 산업보건학회에 위임해 만든 공익법인 ‘LG디스플레이 산업보건 지원보상 위원회’와 SK하이닉스가 한국산업보건학회에서 선정한 전문가로 구성된 제3자 운영 형식의 ‘에스케이하이닉스 산업보건 검증위원회’를 각각 설립한 것과 대조적이라는 지적이다.

이번 판결로 삼성전자 측의 직접적인 피해는 없을 전망이다. 이번 소송은 근로복지공단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이기 때문에 삼성전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피해자 측도 산재인정과 유족급여 등 행정소송 중심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삼성 측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산재를 인정받는 소송도 쉬운 게 아니다”면서 “고의 과실까지 입증해야 하는 민사 또는 형사 소송은 당분간 제기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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