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아의 취준진담

‘만원 언제 줄 거예요?’ 쉐어하우스에 살았을 적 룸메이트 언니에게 전하지 못한 그 말. 그 언니는 관리비를 몇 번 땡쳐먹은 뒤 방을 뺐다. 그 때도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깜빡했어. 다음에 줄게”라며 방실거릴 때 “그 말 몇 번째냐. 안 갚는 게 습관인가보다”라고 응수할 수 있었을 거다.


팩트폭력이란 말은 수입산이다. 'Stop using fact.' 무심코 던진 사실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말로 미국에서 비롯됐다. 사전적 정의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용례를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되레 온·오프라인에서 사실을 말하는 행위가 유머코드가 되면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인 밈(Meme)으로 자리잡았다. 단순히 말하면, 밈은 유전자(gene)같은 특성을 지녀 '모방-변이-전달'되며 '유행'을 이루는 문화의 단위 혹은 요소라 할 수 있다. 전파되기에 기억이 쉽고 명확한 요소일수록 전파성이 높아 살아남는다.

팩트를 말하는 상황이 재밌게 받아들여져 일종의 놀이가 된 셈이다. 공부의 신 강성태가 ‘아이가 학원에선 공부하는데, 집만 오면 안 해요’라며 고민하는 학부모에게 “그런 학생들은 학원에서도 안 해요”라는 말로 유명해진 것처럼 말이다. 이건 내게 분명 축복이다. 친한 친구의 앞니에 낀 고춧가루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착해서가 아니다. 남에게 비난받고 싶지 않은 욕구 때문이다. 나르시즘적인 자존감, 즉 유아기에 머물러 늘 ‘입에 발린 소리’만 듣고 싶은 성향이다.

이제 코페르니쿠스 전환이 일어났다. 더 이상 팩트를 에둘러 겨우 말하거나, 아님 아예 은폐해버리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지동설’을 받아들인 셈이다. 지구가 중심이라든지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나르시즘을 극복한 사람들. 이젠 “너 지금 나한테 팩트폭력하는 거지?”하고 웃으며 응수하면 그만이다.

‘폭력’이 풍기는 부정적 어감 때문에 언쟁이 일곤 한다. 혹자는 팩트폭력이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가혹한 인간의 이중성의 발현이 아니냐며 지적한다. 그러나 이 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팩트폭력하는 주체는 “윽 팩트폭력 당했어” 정도의 상대 반응을 예상하고 던진다. 즉 자신이 ‘가해자’가 되므로 가능한 놀이다. 솔직함이 종종 타인에게 상처가 된다는 지점을 전제한 행위다. 한 때 유행했던 ‘당연하지’ 게임처럼.

팩트폭격기라는 예능 캐릭터가 웃음 포인트가 됐다. 그러나 위로가 절실한 상대에게 현실을 말하는 건 팩트폭력이 아니라 언어폭력이다. 팩트폭력은 언어폭력과 다르다. 새로운 말이 생기면, 새로운 사고가 따라오듯. 우회적 말하기를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는 점점 사실을 놀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팩트가 갖는 긍정적 어감과 폭력이 갖는 부정적 어감이 융화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울고 싶은 상황을 가리켜 ‘웃프다’라는 미묘한 말이 생겼을 때, 우린 감정에 대한 폭이 더 넓어진 것처럼, ‘팩트폭력’은 문화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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