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결의 갓수, 지구에 매달리다

나는 갓수(God+백수·여유있는 백수)다. 지난 여름, 취업준비생 친구랑 술을 마셨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심신이 배배꼬인 취준생들. 친구는 취업준비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게 몇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려줬다. 기업마다 보는 인적성 시험과 면접에 정답이 있다고 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취준생 사이에선 한화는 의리, 현대차는 충성에 입각해 답변해야한다는 말이 오간다. CJ나 신세계는 새로운 아이디어, 혁신, 젊음을 강조해야한다고 한다나.

윤리적 판단을 강요하는 인적성 시험에 정답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시험출제자도 알고 시험을 치는 수험생도 아는 정답을 굳이 시험으로 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대한민국 취준생이라면 이력서를 수십개 쓰는게 당연하다. 한화나 현대차 면접에서는 의리와 충성으로 뭉친 조선시대 의협이자 충신으로 연기하고, CJ나 신세계는 젊은 마인드로 무장한 혁신의 아이콘으로 비춰지려고 노력하는 셈이다.

내가, 내 친구가, 그리고 대한민국 청년이 처한 현실이 애처롭다. 일련의 취업준비 기간을 거치면 취준생들은 어딜가도 자기 가치관을 구부릴 수 있는 존재가 될터이다. 자연스레 기름장어로 변모한다. 의리던 혁신이던 상관없이 어디에나 맞춰줄 수 있는, 한마디로 충성을 바치는 상품이 되는 셈이다. 기업 입장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그렇게 중요한 통제의 대상인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혁신을 통해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 내야하는 기업이 이런 천편일률적인 채용방식으로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물론 기업은 자기 기업에 어울리는 사람을 선별할 권리가 있다. 애초에 혁신을 일으키는 인간보다 주어진 일만 불평없이 하는 사람을 뽑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별기준이 능력보다는 가치관에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일을 배울 때 중요한 열정이나 적성도 보겠지만, 충성이나 의리같은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점도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충성과 의리의 이면은 얼룩져있다. 한국 근로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악의 노동 시간과 강도에 시달린다. 세계 최고의 충성심과 의리를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그 효율성과 보상은 별로다. 열정페이, 잦은 야근 등으로 피로와 삶에 지친 직장인들을 많이 봤다. 다른 나라 기업들은 충성과 의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흔한 인적성 시험 안보고도 잘만 굴러가는게 그저 신기하다.

우리는 무엇에 충성을 하고 의리를 보여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회장님들과 기업이 저지른 비리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들을 수 있는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높은 노동강도와 적은 임금에도 기업과의 의리를 침묵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친구한테 들은 자주 등장하는 유형의 인적성 문제는 이렇게 묻는다. "회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서류를 내일까지 마감해야한다. 야근하던 중 어머니(아내, 자녀)가 위독하시다는 문자를 받았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정답은 예상하다시피 일을 최대한 마무리하고 가족을 나중에 챙겨야 한다. 가족관계를 내버리면서까지 일을 하게하지만 보상은 신통치 않다. 그럼에도 직원들은 그 충성과 의리를 오래오래 간직한다. 그 기업 비결이 정말 궁금하다. 나도 취직하면 알게될까? 아니면 백수생활을 오래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걸까.

취준생임에도 쓸데없이 많은 의문이 남는다. 안타까운건 내가 이 사회 밑바닥에 있다는 점이다. 내가 하는 말들은 치기 어린 젊은이의 생각없는 말이자 아직도 취직하지 못한 실패자의 푸념이요, 낙오자의 비겁한 변명이다. 한시라도 빨리 기름장어가 되어 무언가에 충성하고 싶은 이 마음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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