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웅의 콜라주 소사이어티

세계 5대 공적연금 네덜란드 연기금이 22일 삼정전자에 정경유착 해소를 촉구하는 질의서를 보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세계 주요 연기금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기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유엔의 ‘책임투자원칙’에 따라 자금을 운용한다. 이에 네덜란드 연기금이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삼성의 정경유착 사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질의서가 삼성전자가 이번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 건전한 기업이 되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많은 경우 한 시스템 내에서 제도변화는 외부 충격으로 인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도나 체제 변화가 이뤄지는 원인은 내생적 문제에서 야기되는 적폐들이 누적되고, 그것으로 인해 현 체제에 대한 사람들 불만이 폭발하는 것에서 찾는다. 이것은 반만 옳은 해석이다. 제도 혹은 체제 변화는 내생적 원인 못지않게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대표 사례가 프랑스 대혁명이다. 사람들은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면세혜택과 루이 14세 때부터 누적된 재정적자에 루이 16세의 방만한 국가운용과 미국 독립전쟁 지원, 그리고 미시시피 버블의 실패로 인해 프랑스 대혁명이 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이러한 내생적 문제 못지않게 외생적 문제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그의 저서 <혁명의 시대>에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서로 다른 분리된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즉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자 그에 자극받은 프랑스 역시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미국 독립혁명 지원이나 미시시피 회사 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이 실패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제도와 사회적 규범이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아제몰루와 로빈슨의 이론과 실증분석의 틀에도 이는 들어맞는다. 즉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제도적 변화는 영국의 내생적 성장요인이 됐지만, 프랑스에게는 외생적 충격이 됐다. 이것이 프랑스의 급진적 제도변화를 야기했으며, 이 급진적 정책의 추진이 영국을 추격하는데도, 프랑스 내부의 누적된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안정시키는데도 실패하면서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굉장히 급진적인 체제변화는 결국 외생적 충격과 내생적 요소가 모두 작용하였기에 발생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이 둘 중 하나가 없었을 때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흥미로운 과제다.

외생적 충격으로 인한 급진적 체제변화는 한국에서도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한국 경제의 변화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 경제는 재벌들의 방만한 경영, 불투명한 회계, 정부의 은행 업무에 대한 극심한 간섭, 발달하지 못한 내부 금융시장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인데, 이 과정을 단숨에 해결한 것이 외환위기로 인해 정부가 추진한 기업구조조정과 빅딜이다. 물론 이 과정이 민간 주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되었고, 그것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문제다. 그렇지만 1997년 당시 한국 경제와 한국 기업들이 직면한 상당히 많은 문제점들은 외환위기라는 굉장히 극단적인 외부충격으로 인한 체제전환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기업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외부 충격이 기업 내부 체제변화를 이끌어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소버린 펀드의 SK 주식회사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일 것이다. 당시 SK는 분식회계 및 부실경영으로 상당히 많은 문제를 지닌 상태였고, 이러한 약점을 노려 소버린 펀드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했다. 이 인수합병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SK 주식회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상당히 많은 변화를 이루었고, 기업지배구조까지 개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이번 삼성전자의 경우는 지금까지 언급한 사례들을 준용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유는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의 규모나 강도가 상술한 경우처럼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갤럭시 노트 7 배터리 폭발 사고와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정경유착 등 내부적 문제는 심각한 상태다. 따라서, '만약'이라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네덜란드 연기금이 삼성전자가 윤리경영을 따르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투자금을 회수할 경우, 이것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하나의 신호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에 투자한 다른 외국인 투자자들도 그들의 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삼성전자에 있어 중요한 외부적 충격이다. 따라서 관건은 네덜란드 연기금이 삼성전자에 보낸 질의서를 통해 표출된 외부 충격의 신호를 삼성전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지가 될 것이다.

내부적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생적 충격에서 야기되는 급진적 방법으로 해결할 경우, 그에 수반되는 문제들은 심각한 경우가 많다. 이는 삼성전자가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볼 때 중요한 문제다. 네덜란드 연기금의 질의서 문제를 중요하게 봐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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