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SK온 등 합작공장 차질 우려
LG화학·롯데도 불확실성 가중
비자 제도 개선 없인 대미 투자도 제동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사진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사진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정용석 기자] 미국 이민 당국의 대규모 단속 사태가 배터리 소재업계의 북미 진출 전략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국인 300여 명이 구금된 조지아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공장 사태 이후 단기 비자(B-1·ESTA)를 통한 출장·파견이 사실상 막히면서 미국 투자 프로젝트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투자 결정을 마친 기업은 물론 진출을 저울질하던 업체들도 ‘재검토’ 압박을 받는 형국이다.

8일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최근 구금된 한국인 근로자 대부분은 ESTA(전자여행허가)나 단기상용(B-1) 비자로 미국에 들어가 공장 건설 현장에서 근무해왔다. 이 비자는 회의 참석이나 장비 설치 같은 제한된 업무만 가능해 현장 근무에는 제약이 따른다. 업계에서는 그간 관행처럼 활용돼온 편법적 출장 구조가 미국 당국의 대대적 단속으로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와 재계 모두 “직원 석방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제도적 해결 없이는 언제든 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특히 배터리 공장은 짓는 데도 크고 시운전 기간도 길어, 단기 파견 인력이 필수적이다. 이번 사건이 그 취약점을 고스란히 보여준 셈이다.

미국 조지아주 엘라벨에 있는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 / 사진=현대차그룹
미국 조지아주 엘라벨에 있는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 / 사진=현대차그룹

◇ 투자 확정 기업들 ‘비상’···투자 검토 기업들도 ‘주춤’

비자 차단의 직격탄은 이미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고 현지 공장을 짓고 있는 기업들에 떨어졌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함께 인디애나주에 합작 2공장을 세우고 있고, GM과도 합작 배터리 공장을 추진 중이다. SK온은 포드와 손잡고 켄터키·테네시에 블루오벌SK 합작 공장을 건설하고, 조지아주 킹스턴에서는 현대차그룹과 합작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양사 모두 당장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이 마땅치 않아 “상황을 주시하겠다”는 입장 외에는 별다른 대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소재업계도 마찬가지다. LG화학은 테네시에 32억 달러(약 4조2천억원)를 투자해 연간 12만톤(t) 규모의 양극재 공장을 건설 중이다. 롯데케미칼과 롯데알미늄은 각각 전해액과 동박 생산 공장을 켄터키주에 짓고 있다. 이들 기업 모두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인센티브 수혜를 위해 미국 내 생산 기반 확보가 절대적인 만큼 현지 인력 운용의 불확실성은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비자 발급이 지연되면 현지 비숙련 인력을 채용해 교육해야 하는데, 이 경우 인건비는 치솟고 공사 기간도 길어진다”며 “결국 투자를 서두르던 기업들도 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투자 결정을 미루고 있던 기업들은 발걸음을 더욱 늦추는 모양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는 북미 분리막 공장 신설을 포함해 여러 투자 시나리오를 검토해왔으나 이번 사건으로 다시 셈법을 따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동박 업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역시 현지 공장 부지 물색을 진행해왔으나 비자·노동 문제로 부담이 가중되면서 속도 조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건립되고 있는 LG화학 양극재 공장. / 사진=LG화학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건립되고 있는 LG화학 양극재 공장. / 사진=LG화학

◇ 가동 지연은 곧 보조금 손실

문제는 시간이다.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는 2032년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된다. 배터리 셀 생산 시 1kWh당 35달러, 모듈 1kWh당 10달러에 이르는 세액공제 혜택은 공장이 실제 가동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적용된다. 즉, 가동이 1~2년 늦어질수록 보조금 수혜 기간이 줄어들고 그만큼 기업들이 챙길 수 있는 재정적 효과도 급격히 감소한다.

예를 들어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그룹의 조지아 합작 공장은 당초 내년 초 가동을 목표로 막바지 공정에 들어갔지만, 이번 사태로 일정 지연이 불가피하다. IRA 대응을 위해 미국 내 생산능력을 조기에 확보하려던 전략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다른 기업들 역시 비자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박종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 / 사진=연합뉴스
박종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 / 사진=연합뉴스

◇ 정부·재계 긴급 소집, 해법 찾을까

사태가 확산되자 정부도 움직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서울 여의도에서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함께 긴급 간담회를 열고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화학, HD현대, 한화솔루션, LS 등 대미 투자 기업을 불러 현장의 어려움을 들었다.

기업들은 단기 파견용 신규 비자 카테고리 신설이나 기존 비자 제도의 유연한 운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종원 산업부 통상차관보는 “기업들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외교부와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며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정책 간담회에서 “향후 미국 내 우리 국민의 안전과 기업의 원만한 경영 활동을 위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비자 쿼터를 확보하는 등 구조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부 대응이 한 발 늦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외교부는 과거 한국인 전문인력 취업비자(E-4) 1만5천개 신설을 추진했지만 미국 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그 사이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ESTA와 B-1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제도적 해법이 마련되지 못한 가운데 대규모 단속이 현실화된 것이다.

배터리업계 한 인사는 “북미 현지 투자는 이미 수십조원이 집행 중이거나 예정된 상황인데 비자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일정 지연과 비용 상승은 불가피하다”며 “정부가 미국 측과 제도 개선 협의를 가시적 성과로 이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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