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집과 낭만 23

나의 동네 순례기 

1980년대 드라마 속 사람들은 꼭 저렇게 전화를 받았다. 어린이던 나는 항상 생각했다. 왜 항상 평창동인 거지? 마산 사는 나는 “월포동입니다” 하고 전화를 받지는 않는데? 왜 “여보세요”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동네를 밝히는 거지? 비밀을 알게 된 건 한참 후다. 당시 드라마에 나오는 ‘고오급’ 2층 양옥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서도 꽤 부잣집 사람들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부자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는 평창동이었다. 그러니까 “평창동입니다”라는 말인즉슨 “네, 바로 그 부잣집에 전화하신 거 맞습니다”라는 자긍심의 발현인 동시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이 집안은 유서 깊은 평창동 부잣집입니다’라는 설정을 환기시키는 서사적 장치던 것이다. 물론 내 해석이 맞는지 아주 정확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혹여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중 1980년대 평창동에 살아보신 분은 꼭 확인 및 정정을 부탁드린다.

서울에 살다 보니 평창동에 갈 일도 종종 생겼다. 영화쪽 기자로 일하다 보니 엔터테인먼트 업계나 이런저런 사업을 하시는 분들 집에 초대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그중 많은 분이 평창동 주민이었다. 그 동네에서 몇 대를 살아온 분도 꽤 있었다. 평창동이라는 동네는 어딘가 좀 희한한 구석이 있다. 아주 좁은 도로 하나를 양옆에 두고 대부분의 거대한 저택들이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며 지어졌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곳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무리인 동네다. 바로 그게 이 동네에 부잣집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평창동 주민 한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도 없는 강남 것들”이 아파트에 바글바글 모여 사는 동안, 진짜 조용하게 살고 싶은 부자들은 기사 딸린 자가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평창동 산기슭에 커다란 집을 지어놓고 사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평창동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한 명문 양반가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한양의 중심인 종로에서도 그나마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우아하게 살 수 있는 동네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럼 당시에는 그 산기슭까지 어떻게 올라갔으려나 싶은데, 사실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돈이 많으면 가마꾼들이 지고 가는 가마라도 타고 올라갔을 테니 말이다. 요즘 평창동은 거대한 저택들 사이로 근사한 갤러리들이 많이 생겼다. 국립이나 시립미술관이야 시민들이 쉽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동네에 생기기 마련이지만 사립 갤러리들은 그렇지 않다. 그림을 많이 살 만한 부자들이 많은 동네에 짓는 게 이치에 맞다. 다들 알다시피 그림이라는 게 얼마나 비싼가 말이다. 나도 아티스트 친구들의 그림 몇 점을 구입한 이후로 ‘컬렉터’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데, 평창동 갤러리에 걸려 있는 가로 5m짜리 그림을 “어머 이건 양평에 새로 짓는 별장 거실에 두면 좋겠네요”라며 구입하는 컬렉터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창동에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거기 살 만큼 돈이 많지도 않다. 물론 평창동에도 자그마한 아파트는 있지만 이왕 그 동네에 살려면 2층 양옥은 지어 올려야 제맛 아니겠는가. 20여 년 전 취업해 서울로 상경하면서도 딱히 선호하는 동네는 없었다. 서울을 몰랐기 때문이다. 첫 회사가 공덕동에 있었으니 마포 어디쯤이면 되겠다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원칙은 회사와 가까운 동네에 사는 것이다. 처음 작은 원룸을 구한 곳은 홍대 근처다. 지방 사람들은 서울 어떤 동네가 좋은지 잘 모른다. 강남이 비싸다는 사실만 안다. 당시 나는 젊은이였다. 2000년대 초반 지방 젊은이 머릿속 서울은 모두 세 덩어리로 나누어져 있는 도시다. 강북, 강남, 그리고 홍대 앞이다. 당시 서울 젊은이들 문화의 모든 것은 홍대 앞에서 탄생했다. 록밴드도 홍대 앞에 있었다. 힙합 클럽도 홍대 앞에 있었다. 예쁜 카페도 홍대 앞에 있었다. 빈티지 옷 가게도 홍대 앞에 있었다. 홍대 앞에 산다는 건 힙스터라는 소리다. 나는 서울 힙스터가 되고 싶었다.

2년 만에 도망치듯 홍대 앞을 빠져나왔다.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년 뒤에 옮긴 상수동 원룸 아래위는 아마도 밴드를 하는 친구들이 살았던 것 같다. 나는 레드 제플린의 기타 독주를 들으며 잠이 드는 음악 팬이었지만 밤이고 낮이고 들려오는 기타 소리가 그렇게 사람을 거스르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질 못했다. 게다가 원룸 1층에는 바이크 가게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거침없는 친구들이 새벽 3시에도 작고 예쁘지만 거침없이 시끄러운 바이크를 타고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공덕동으로 갔다. 걸어서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위치에 집을 구했다. 이번엔 회사가 이사를 갔다. 한 번 이사를 간 회사는 또 이사를 갔다.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취업하자 집은 더욱 멀어졌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사람은 한 번 정착한 동네를 잘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20년간 공덕동 주민이다.

2000년대 초반 공덕동은 어딘지 모르게 먼지가 자욱한, 만주 벌판에 위치한 거친 동네 같은 느낌이 있었다. 특히 아수라장에 가까웠던 공덕로터리가 그랬다. 아무리 예쁘게 봐주고 싶어도 예쁜 동네는 아니었다. 지난 20년간 공덕동은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를 거쳤다. 공덕동과 아현동은 산기슭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빨간 벽돌 빌라들이 이글이글하던 동네다. 그 동네들은 모조리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지극히 서민적이던 동네는 20년 만에 어딘지 모르게 강남을 닮아가려는 몸부림으로 가득한 중산층 동네가 됐다. 여의도, 광화문, 이태원, 용산과 김포나 인천에 있는 공항으로의 접근성이 좋다 보니 서울의 다른 동네보다 재개발이 더 빨랐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20년 전 주말에는 먹을 것 하나 없던 동네가 ‘쓰레빠’를 끌고 10분만 걸어가면 근사한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 동네가 된 것이다. 이 동네에 일찌감치 아파트를 산 나는 곧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부동산 현인’ 비슷한 존재가 됐다. 몇 년 전 친구들은 그나마 가격이 저렴한, 아니 비교적 저렴한 은평구에 아파트를 사기 시작했다. “오빠(혹은 형)가 집을 산다고 했을 때 같이 샀어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선대인이 새 정권 들어서면 아파트값 폭락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었던 내가 등신이지”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사는 동네에 완벽하게 만족하느냐. 인간이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고 나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아주 세속적인 욕망으로 굴러가는 존재다. 20대 후반에는 홍대 근처의 원룸도 좋다. 30대 중반이 되면 교통 편한 동네 오피스텔이 좋다. 40대가 되면 이것저것 적당히 갖추어진 동네 아파트가 좋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얼마 전 어머니가 디스크 수술을 하러 서울에 올라왔다. 병원이 청담역 근처다. 병원 옆에는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줄을 이어 쭉쭉 뻗어 있었다. 어머니가 절뚝절뚝 걸으며 한마디 했다. “어머나! 얘, 이 동네 참 평온하고 좋다. 너도 지금 사는 아파트 팔고 여기로 오면 어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 

지금 아파트를 팔면 이 아파트 제일 작은 평수의 절반 정도를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어머니와 제가 반반씩 내고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방법이 있겠네요.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어머니와 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만 그녀도 나와 살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원래 가족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 떨어져 살아야 평화가 지켜지는 법이다.

나는 아마도 평생 공덕동에 살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작은 아파트 한 채면 부족한 것은 없다. 거짓말이다. 나는 올여름 새로 구입한 오렌지색 빈티지 천장 조명과 얼마 전 구입한 그림 하나를 도저히 걸 데가 없어서 거의 창고로 쓰는 책방에 방치 중이다. 나는 유서 깊은 충동 구매자로서, 집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커다란 물건을 사는 아주 무책임한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넓은 평수의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 시세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앱을 하나 깔았다. 내 인생 처음으로 부동산 앱을 깔았다. 그러니 이 글은 결국 안 그래도 세속적이던 인간이 보다 세속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고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뭐 이런 꼰대 같은 글이 다 있나 싶은 20대 독자 여러분은, 20년 후 이 글을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어떤 글은 그걸 이해할 적당한 나이가 있게 마련이다.

김도훈 @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CREDIT INFO
editor     심효진
words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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