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당장 현장 투입할 고급인력 필요”
반도체 전공자 “실무 경력 쌓을 기회 부족”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한국 반도체 산업 곳곳에서 인력난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역설적인 것은 이제 막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는 반도체 전공자들 역시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고급인력을 요구하고 있고, 구직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은 현장 경력을 쌓을 기회가 부족하다고 읍소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근로자 10인 이상 전국사업체 중 2만 1081개 표본사업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2023년도 산업기술인력 수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도체 기업들은 미충원인력 발생 사유로 ‘임금 조건이 구직자의 기대와 맞지 않아서’(46.8%)를 가장 많이 꼽았다. ‘현장 투입이 바로 가능한 숙련·경력을 갖춘 인력이 없어서’가 29.1%로 그 뒤를 이었다.

해당 조사 결과만 봐도 기업과 구직자 간의 온도차를 뚜렷이 알 수 있다. 기업들은 엔지니어의 단 한 번 실수로 수백억원의 손실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기에 실무 경험이 부족한 신입을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기 어렵다. 이들을 가르치면서 월급을 줄 수 있는 여력도 없다. 이는 대기업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반도체가 고도화될수록 웨이퍼 파손으로 입는 손실 규모는 막대하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더 빨라진 반도체 기술 트렌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솔루션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도 필요하다. 이 때문에 반도체 설계기술을 겸비한 고급인력의 확보가 매우 절실해졌다.

최재혁 ISSCC 아시아지구 부의장(서울대 교수)은 작년말 ‘ISSCC 2024’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반도체도 분야마다 필요한 인력의 수준이 다르다. 지금 가장 필요한 부분이 회로설계 석·박사급으로, 고급인력 투자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라며 “기업에서 정확히 어떤 인력이 필요한지 세분화해서 정의한 다음 거기에 맞는 전략을 추진해줬으면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반면, 우리나라 수출 최대 품목인 반도체를 전공으로 선택해 그간 열심히 공부해온 구직자들은 그만한 수준의 대우를 요구한다. 정작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보니, 또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하다. 기업들은 현장에서 실무 경험이 많은 경력직을 요구하는데, 쌓아온 건 전공 학점과 몇 번의 반도체 공정실습이 전부다.

정부도 이런 실태를 파악하고,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산업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반도체 계약학과 및 계약정원제, 반도체 특성화대학, 반도체 아카데미 등의 교육과정을 통해 올해 기준 학사급 실무 인재 약 3만명을 육성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AI 반도체 대학원과 반도체 특성화 대학원, BK21 교육연구단 등 연구개발(R&D) 기반의 인력 양성 과정을 확대해 석·박사급 고급인재도 3700명가량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설계 인력 관련해서도 학부생들에게 자신이 설계한 칩을 직접 제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내 칩(My Chip) 서비스’를 작년보다 6배 확대(600명)할 방침이다.

기업들의 노력도 엿보인다. 컴퓨트 익스프레스링크(CXL) 반도체 팹리스 기업인 파네시아의 정명수 대표는 올 초 반도체 전공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테크데이 행사에서 “과거와 달리 젊은 엔지니어들이 실리콘을 접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아 어디서 경력을 쌓아야 할지 모르고 있다”며 “젊은 엔지니어가 성장하는 것이 반도체 산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회사도 같이 성장하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들을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다. 지금 당장 시장 주도권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할 기업들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반도체 인력 양성은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10년을 내다보는 장기 프로젝트다. 반도체를 선택한 우리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튼튼한 다리를 놓아주는 산업계와 정부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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