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무죄 뒤집고 원료물질-질병 인과관계 인정···금고 2년~4년 선고
“실험 더 필요” 서울대 실험 결과 받고도 판매 중지·회수, 관찰 의무 이행 안 해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 사진=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왼쪽)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제품 출시 전 동물들을 상대로 한 안전성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연령대의 불특정 다수의 국민에게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유통됨으로써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여러 다양한 환경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유해한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해 소비자들을 사망 또는 상해에 이르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제조사와 판매사 전직 임·직원들이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원료물질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했던 1심 판결을 뒤집은 항소심 판결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서승렬·안승훈·최문수)는 11일 가습기살균제 사건 관련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같이 밝혔다.

재판부는 “이 판결의 결론은 ‘만일 그때로 다시 돌아갔더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는 법리적으로는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업무상과실 또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는 예견가능성 또는 회피가능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이 재판부가 사건의 결론을 내는 데 시작점이 됐던 질문이기도 하다”면서 “피고인들은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마우스를 이용한 가습기메이트 간이 흡입노출시험’을 의뢰하고서도 그 결과를 받기 전에 제품을 출시했고, 출시 후 ‘백혈구 수치 감소 등의 유의미한 변화가 나타나 조금 더 실험이 필요하다’는 실험결과를 보고받고도 판매 중지나 회수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제조·판매업자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한 업무상과실에 해당한다”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사이 서울대 실험보고서가 건네진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실험보고서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그 내용을 알았다면 각 가습기살균제를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구체적 법리에 대해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옥시 사건 피고인들과 공동의 업무상의 주의의무를 위반한 과실범의 공동정범 관계에 있고 ▲그들과의 중첩적 또는 순차적 과실과 이 사건 피해자들이 입은 이 사건 폐질환 또는 천식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양형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함유된 이 사건 각 가습기살균제 제품을 제조하거나 제조·판매하는 회사의 임직원들로서 그 맡은 업무에 따라 제품 출시 전 수행하도록 요구되는 안전성 검사를 수행했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제품출시 후 요구되는 관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그 피해를 확대시켰고, 일부 피고인들의 경우에는 가습기제품의 용기에 허위의 사실이 기재되도록 한 업무상과실까지 존재한다”면서 “피고인들의 이러한 과실이 다른 공동정범의 업무상과실과 중첩적 또는 순차적으로 경합한 결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사건 폐질환 또는 천식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그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 사건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들이 입은 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그동안 겪었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거듭 호소하며 피고인들에 대한 엄벌을 호소하고 있다. 이 사건 각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국가적·사회적 비용이 소요됐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피해의 완전한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장시간 수사와 형사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이 있더라도 피해자들과 가족의 고통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끝으로 재판부는 “사건 시작부터 선고까지 법리와 양형, 각각 주장하는 개별사정에 대해서 치열한 고민을 했다. 개별 피해를 읽으면서 너무나 감정적으로 힘들었다”라며 이례적인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이날 재판부는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각각 징역 2~4년을 선고했다. 금고는 신체의 자유는 박탈하되, 징역과 달리 강제노역은 부과되지 않는 형벌이다.

다만 재판부는 과실범의 공동정범의 성립 여부, 인과관계의 인정여부에 관해 법리적 쟁점이 큰 사안이라며 이들을 법정구속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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