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출연, 채권단 요구 6분의 1수준···티와이홀딩스·SBS 지분 매각은 두루뭉술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태영건설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태영그룹은 3일 워크아웃 신청 관련 채권단 설명회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자구안을 내놨다. 지주사인 티와이홀딩스 지키기 또는 오너일가를 위한 자구계획이란 지적까지 나온다.

태영그룹은 채권단에 계열사 매각 계획 등이 담긴 자구안을 제시했다. 에코비트(종합환경업체)와 블루원(레저사업체)을 매각하고 평택싸이로(양곡·화물 사업) 지분 등을 담보로 제공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하지만 이러한 자구안은 태영건설이 워크아웃 신청 초기부터 산업은행과 협의해 온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핵심 계열사인 SBS 지분 매각이나 담보 제공, 사재출연 계획 등은 자구안에서 빠졌다.

무엇보다 태영그룹은 주채권자인 산업은행과의 기본적인 약속도 어겼다. 티와이홀딩스는 최근 태영인더스트리 매각자금 중 1549억원을 태영건설에 지원하기로 산업은행과 약속했다. 하지만 확보한 자금을 티와이홀딩스 채무 상환에 사용했다. 태영건설에 지원된 금액은 400억원에 불과했다. 산업은행은 “3일 낮 12시까지 나머지 1149억원을 넣으라고 했는데 티와이홀딩스 채무 변제에 활용해야 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태영 측과 신뢰가 상실된 첫 번째 케이스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날 설명회엔 90세의 윤세영 창업회장이 나서 “사력을 다해 태영건설을 살리겠다”며 워크아웃 개시에 동의해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채권단의 질의응답을 앞두고 설명회장을 퇴장하면서 채권단의 신뢰를 더 얻지 못했다. 태영그룹은 SBS 매각에 대해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준비하고 있다”며 원론적인 답변에 그치면서 채권단의 원성을 자아냈고, 티와이홀딩스 지분의 매각·담보 제공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해 채권단의 공분을 샀다.

다음 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비판도 이어졌다. 이원장은 “수백 수천억원에 달하는 오너 현금 유동자산이 있는데 워크아웃에 단돈 1원도 포함해 제시하지 않았다”며 “태영건설이 아닌 오너 일가를 위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커지자 태영그룹은 진화에 나섰다. 티와이홀딩스는 이날 484억원 규모의 윤세영 태영그룹 창업회장 오너 일가의 사재출연 내역을 공개하며 자구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해 정면 반박했다. 티와이홀딩스에 따르면 윤석민 태영그룹 회장은 본인의 태영인더스트리 지분 매각대금 416억원(주식양도소득세 공제 후)을 전액 태영건설에 지원했다. 태영건설 자회사 채권 매입에도 30억원을 투입했다.

하지만 이 같은 금액은 채권단이 태영그룹 일가에 기대한 최소 금액의 6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동안 채권단은 태영건설의 연대보증액만 3조7000억원인 점 등을 들어 3000억원 이상의 사재 출연을 요구해 왔다.

태영그룹의 행태는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다른 그룹과 사뭇 다르다. 두산그룹은 채권단과 약속한 자구노력을 성실히 이행해 짧은 기간에 계열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모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석탄화력 등 전통 발전분야의 실적 둔화와 자회사에 대한 자금지원 부담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던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금융시장 경색으로 차환이 막히면서 유동성 부족에 직면했다.

두산그룹이 마련한 두산중공업을 살리기 위한 자구계획엔 두산그룹 사옥인 두산타워 매각,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솔루스 등 계열사 매각, 계열주와 두산의 두산중공업 유상증자 참여와 두산퓨얼셀 지분 등 보유자산 증여 및 현물출자, 인원 감축과 임금동결 등 임직원의 고통분담까지 망라됐다.

금호그룹은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워크아웃 당시 낼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내놨다. 2012년 금호산업 워크아웃 당시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매각해 2200억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했다. SK네트웍스는 2007년 최태원 SK회장이 워커힐 호텔 주식을 전량 무상 출연하면서 워크아웃 졸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지분가치로 1200억원 규모에 달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300억원을 내놨다. 이후 현대상선은 4개월 만에 5000%에 달하던 부채비율이 200%로 줄어 자율협약을 졸업하게 됐다.

이처럼 그동안 워크아웃 사례를 보면 ‘대주주가 희생한 만큼 지원한다’는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돼 왔다. 하지만 태영그룹은 희생 의지는 보이지 않고 대주주의 손실만 줄이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태영그룹의 자구안대로라면 손실을 대주주가 아닌 협력업체·수분양자·채권자 등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워크아웃 취지는 살릴 만한 기업은 살려내 해당 기업에 재기 기회를 주고 국민 경제에 충격과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태영건설은 부동산 호황기에 시공·시행을 한꺼번에 맡으며 1조원이 넘는 이익을 벌었고 그 상당 부분이 오너 일가 재산 증식에 쓰였다. 이제는 받은 만큼 희생으로 보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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