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소부장업체 판로 협력 강화해야

[시사저널e=고명훈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함께 네덜란드를 찾았다. 반도체산업 ‘슈퍼을’이라 불리는 장비 회사 ASML의 본사를 직접 방문해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기 위해서다. ASML은 반도체 공정의 미세화 기술 핵심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만드는 세계 유일의 회사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물론 TSMC, 인텔 등 글로벌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ASML의 EUV 노광 장비는 대당 최소 250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공급처가 부족하다 보니 고가에도 없어서 못 산다. ASML과의 관계가 돈독한 회사만이 이 장비를 확보할 수 있다. 빅테크 CEO들과 국가 정상까지 이 회사를 직접 찾는 이유다.

한국에도 ‘슈퍼을’까지는 아니지만, 기술력 측면에서 이미 글로벌 정상 수준에 이른 장비 회사들이 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전 세계 원자층증착(ALD) 장비 시장에서 10%가량의 점유율로 순위권에 들었다. 회사는 전하 축적도가 높아 미세 공정의 핵심 재료로 분류되는 하이케이(High-K, 고유전율) 캡(Cap) 공정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지녔다. 국내에선 SK하이닉스에 해당 장비를 납품 중이다. 기존 메모리에서 비메모리 분야로 장비 공급을 확대하는 한편, 반도체를 넘어 디스플레이와 태양전지 부문까지 사업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성장세에 힘입어 빛을 발하게 된 곳도 있다. 후공정 장비업체 한미반도체가 그 주인공이다. 한미반도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용 장비인 열압착(TC) 본더를 SK하이닉스 등 주요 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이 회사의 TC 본더는 듀얼 방식으로, 두 개의 본딩 모듈에 각 두 개의 픽커가 달려 있어 경쟁사 제품 대비 생산성이 4배에 달한다. 글로벌 TC 본더 시장은 시바우라, ASMPT, 베시 등이 순위권 내에 있지만, 현재 많은 기업이 한미반도체의 기술력에 주목하고 있다.

이외에도 파크시스템스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제조업에서 활용도가 높아지는 원자현미경(AFM)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가져가고 있다. AFM은 반도체 공정 내에서 결함 검사를 목적으로 활용되는 첨단 나노계측장비다.

한국처럼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사업을 시작하기 좋은 환경이 전 세계에 그리 많지는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 때문이다. 장비를 공동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상대적으로 기회도 많은 편이며, 개발에 성공할 시 공급처 찾기도 수월하다.

반대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한계에 부닥치기도 한다. 기술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은 중요하겠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더 성장하려면 인지도를 보다 높여 해외 판로 확대에 힘써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 그나마 해외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국내 소부장 업체들이 설 곳은 점점 더 줄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 제재에 버티다 못한 중국 현지 업체들이 국산화 작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최대한 다양한 국가와 영역으로 진출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미리 곳곳에 길을 닦아놓은 대기업들이 도와줄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국내 강소 업체들의 해외 판로 확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함께 개발한 장비를 다른 회사에 비싸게 판다고 시기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적어도 못난 형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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