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고법, 무죄 원심 깨고 벌금 100만원 ‘선고유예’
시민단체 “양육비 이면 살피지 않은 후퇴한 판결”

배드파더스 활동가 구본창씨가 2심 선고 이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배드파더스 활동가 구본창씨가 23일 수원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이후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이혼 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온라인 사이트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를 통해 공개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활동가 구본창씨가 항소심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국내 양육비 미지급문제가 공적인 관심사안에 해당한다면서도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개인이 사적 제재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봤다.

수원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윤성식)는 23일 구씨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파기하고 벌금 10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선고유예란 유죄로 판결하되 형의 선고를 보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고유예를 받은 날로부터 2년이 경과하면 면소(공소권이 사라져 기소되지 않음)된 것으로 간주한다. 통상 가벼운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에게 자숙의 시간을 가지라는 차원에서 내려지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양육비 문제가 공적 관심 사안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법률상 허용된 민·형사상 절차에 따르지 않은 채 사적 제재수단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며 “이혼과 양육비 미지급 같은 정보는 개인의 엄밀한 사적 사정이고, 신상정보가 무제한적으로 공개될 경우 사생활의 비밀이 중대하게 침해될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인격권과 양육비 채권의 우열은 쉽게 단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신상공개의 적법 여부는 추구한 목적과 수단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며 “이 사건 신상공개라는 사적제재를 통해 양육비를 신속하게 지급하도록 하려는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고, 공개된 신상정보의 내용이 지나쳐 양육비 채무자의 인격권과 명예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또 “사이트의 신상공개 요건과 시기, 기간 등 기준이 임의적이고 의견청취 등 사전확인,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비방할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에는 사실오인의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적 이익을 취득한 바 없고, 양육비 미지급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법적 제도가 만들어지는데 기여했다”며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에 참작할 사정이 있어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설명했다.

구씨는 양육비 채권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배드파더스 사이트에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 양육비 시민단체 “양육비미지급, OECD 중 우리나라만 처벌 안 해”

이날 항소심 판결과 관련, 양육비 시민단체 양육비해결총연합회(양해연)는 입장문을 통해 “재판 결과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양해연은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모든 절차를 진행해도 양육비를 지급받을 수 없던 현실을 이해하지 못 한 채, 왜 얼굴정보와 직장명을 명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등 사안의 이면을 살피지 않은 채 후퇴한 판단을 내렸다”며 “항소심 판결은 불합리한 피해사실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사회 변화에 대한 그 어떤 개선의 촉구도 할 수 없는 닫힌 사회로 나아가도록 독려한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양육비 미지급이 중대한 아동 학대라는 인식이 부재한 결정이다. OECD 국가 중 양육비미지급이 범죄가 아닌 국가는 대한민국 뿐이다”며 “국가가 아동학대를 방임했기에 탄생한 배드파더스가 공익적 목적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어떤 공익적 사안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부모가정 양육자와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겠다. 배드파더스 사이트가 공익적 목적이었음을 알리는 사회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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