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피해 계산 않고 구국 상소 연달아 올려
나라 되찾으려 74세에 동지들과 항일 의병 일으켜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미지=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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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선생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빼앗기는 상황에서 74세의 나이로 구국 의병을 일으켰다.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며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자신이 피해를 보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구국을 위한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4세 때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노의 문인이 돼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켰다.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했다.

23세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 항일투쟁을 했다. 

◇ 자신이 피해 입어도 구국 상소 계속 올려

선생은 자신의 불리함을 계산하지 않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국의 상소를 계속 올렸다. 선생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결사반대하며 지부소(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당했다. 강화도조약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 조약으로 불평등조약이었기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됐다.

선생은 1895년 일제가 경복궁을 침입해 명성 황후를 죽인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1905년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선생은 을사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5적(五賊)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렸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의 한 단면이었다.

이후 선생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소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1906년 2월 21일(음력) 선생은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난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였던 고석진의 소개로 임병찬을 만났다. 임병찬이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자 선생은 남으로 내려가 거사에 앞서 세력을 모았다. 이후 두 달 간 거의(擧義)를 준비했다. 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 200여 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 일제 침략 대항해 의병 일으키다

최익현 선생은 그 해 4월 13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연을 열어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밝혔다. 그 때 선생의 나이 74세였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이날 의병들은 정읍에 무혈 입성했다. 의병들은 총칼과 탄환을 모으고 군사를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냈다.

이후 의병들이 정읍에서 흥덕으로, 다시 순창 구암사에서 순창 읍내로 행군했을 때는 그 수가 500여 명을 넘었다.

힘을 얻은 선생의 의병들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병은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4월 20일(음력)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령을 전해왔다.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이를 펼쳐 봤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 동포끼리 충돌 피하려 눈물 머금고 의병 해산

이에 최익현 선생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 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남원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 측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됐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괴로워했다.

최익현 선생은 임병찬에게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흩어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선생 곁에 끝까지 12명의 의병이 남았다.

4월 23일(음력) 선생과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돼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이에 선생은 대마도에 감금됐다.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으로 저항해 결국 순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했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돼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했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해 그 해 4월(양력 5월) 노성 무동산에 안장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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