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테크놀로지그룹 조현식·조현범 형제 업무상횡령 등 사건 공판
많은 재산에도 ‘꼼꼼한’ 범죄 저지른 재벌…법조계 “잡범” 비판

[시사저널e=주재한 기자] “희귀병을 앓고 있는 조카의 미국 장기치료를 위해 범죄를 한 점을 참작해 달라”

회삿돈 1억1000만원을 횡령한 A씨의 변호사는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이같이 말했다. 회사에 근무한 적이 없는 누나를 회사원으로 등재시키고 근무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약 1년 6개월간 월급을 준 배경에는 ‘안타까운’ 사정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변호인은 A씨의 범행 동기가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 자금을 유용하기 위한 전형적인 업무상 횡령 범죄와 다르다는 이야기도 했다.

A씨는 재판과정에서 누나를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했다. 본인의 인지상정(人之常情, 사람이면 보통 가질 수 있는 인정)을 누나가 직접 재판부에 말해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누나는 끝내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다. 누나는 A씨의 공범으로 입건됐지만,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서 선처를 받은 셈이다.

누나와 조카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른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조양래 회장의 장남 조현식 부회장이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2020년 자산총액기준 재계서열 43위에 오른 기업이다. 계열사가 24개에 달하고 자산총액은 1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현식 부회장의 구체적인 재산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 백에서 수 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측정된 조현식 부회장의 보수는 6억원이다. 급여를 받아 실제 사용(사후적으로 금액 전부를 반환)한 누나의 재산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판과정에서 ‘자산 1500억 누나를 위해 배임횡령한 조현식’이라는 서류가 제출되기도 했다. 누나는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의 주식도 상당 수 보유하고 있다.

조현식 부회장과 함께 재판을 받고 있는 동생 조현범 사장의 범죄사실은 다소 복잡하다. 업무상 횡령 혐의 외에 배임수재, 금융실명법 위반,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 혐의가 있다. 10년 가까이 하청업체 B사와 계열사 C사로부터 매달 수 백만원씩 총 수 억원을 차명계좌로 받고, 차명계좌를 통해 사용한 것으로 정리된다. 조현범 사장은 배임수재 또는 횡령금액을 유흥비로 사용하기 위해 고급주점 여종업원의 부친 명의로 개설된 차명계좌를 주점 측으로 제공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현범 사장은 지난 2014년 미국 포브스(Forbes)지(誌)가 선정한 ‘한국 최고 부자 50인’ 중 한명이다. 당시 포브스는 조 사장의 개인 재산을 5억1500만달러(약5274억)으로 분석했다. 조현범 사장은 2013년 7억300만원의 연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정보사이트 ‘재벌닷컴’이 그 해 밝힌 조 사장의 2013년 배당액은 64억원이다. 조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하다.

‘꼼꼼한’ 자산가들이 빼돌린 회삿돈이나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수수한 돈은 수억원에 달하지만, 재산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돈이다. 이들은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실형을 면했고, 벌금형으로 양형을 줄여달라고 항소심 재판을 하고 있다. 피해가 회복됐고, 피해 회사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경 받았음에도 가족을 위해 한 범행이라며 더 낮은 형을 요구하고 있다. 입이 쓰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재벌들이 잡범 수준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법조계 일각의 비판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검찰의 구형 이유에 공감이 간다. 검찰은 지난 23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의 범의와 범행 동기를 구분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 부회장이 조카의 희귀병 치료를 돕기 위해 누나를 채용한 동기가 참작되더라도, 가상으로 직원을 채용해 월급을 주는 행위가 범죄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한 의사(범의)는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검찰은 조현식 부회장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조현범 사장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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