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의병 일으켜 무장항일투쟁 나서
독립군들 1920년 ‘봉오동전투 대승·청산리 대첩’ 거둬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홍범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홍범도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100년 전 지금처럼 온산이 낙엽으로 물들던 10월, 나라를 빼앗긴 채 고통 받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준 이들이 있다. 일제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청산리 대첩의 주역 홍범도와 독립군들이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21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백운평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작했다.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선생의 연합부대가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싸움인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했다. 독립군은 10월26일까지 10여 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 “일제 몰아내자” 의병 일으키다

홍범도(洪範圖) 선생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렵게 성장했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해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고 자랐다.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이후 선생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고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해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일제는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면서 항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했다. 1895년 8월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점차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했다.

이에 각지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홍범도 선생은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함께 봉기했다. 이후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해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했다.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하고 12명의 동지를 모집해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였다.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해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김수협 등 의병들이 전사해 선생 혼자 남게 됐다.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했다.

이후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해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했다. 당시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했다.

◇ ‘날으는 홍범도와 의병‘ 일본군 격파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봉기했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했다.

홍범도 선생과 의병부대는 포수들의 총을 압수해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해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했다. 또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명과 전투를 벌여 적군 30여명을 처단했다.

선생과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기도 했다.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하고 소각하기도 했다. 또한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했다. 일본인 금광을 습격해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했다. 이에 선생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렸다.

선생은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활동을 다시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해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했다.

1910년 4월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해 국내로 진격했다. 선생과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수적 열세로 많은 의병이 전사하거나 붙잡혔다. 선생은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 의병과 계몽운동 계열, 힘 합치다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했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해 1910년 6월 결성했다.

선생은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됐다. 선생과 이진룡 등은 의병장 출신인 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 선상에서 의병 계열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과 합일, 공동전선을 모색한 증거다.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으로 광무황제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했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탄됐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했다.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했다.

이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했다.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됐다.

◇ 권업회와 노동회 조직···한인 권익 증진·독립전쟁 준비

이후 선생과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했다. 선생과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 창립됐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합시키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선생은 권업회의 부회장, 사찰부장에 선임돼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힘썼다.

홍범도 선생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도 해나갔다.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했다. 선생은 노동회 회장으로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해 군자금을 조달했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찾았다.

◇ 독립군 빛나는 ‘봉오동전투 대승·청산리 대첩’ 이뤄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 선생은 독립전쟁을 전개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해 그 해 8월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섰다.

선생은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해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 일부를 인솔해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했다. 여기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했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을 갖췄다. 사령관에 홍범도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됐다.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해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실행했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했다.

이에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격퇴당했다. 독립군에게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했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해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독립군들 / 이미지=독립기념관
독립군 / 이미지=독립기념관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해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다. 지형을 이용한 전술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으로 가능했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다.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와 2명의 중상자만 있었다.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훈춘사건’을 조작했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해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 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일제는 중국 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대규모 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훈춘사건’이 있기 전에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했다.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곧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해 섬멸했다.

이어 홍범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뒀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회의 격전을 치러 대승리를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해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명에 부상자는 2100여명이었다.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명, 부상자 220여명이었다.

◇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역량 훼손···한인 권익에 힘써

이후 홍범도 선생은 700여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를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갈등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일어났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대한의용군에 참여해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했으나, 6월 초 부대원 440여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됐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대치 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했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자유시 참변의 배경에는 한국독립군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간의 협상의 결과도 있었다. 당시 북경에서 일본 주중 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 어업권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방택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며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일본과 불화를 갖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독립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독립군의 투쟁 역량이 크게 훼손됐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해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천도( 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1919.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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