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을사조약 체결되자 의병 일으켜
광무황제 명으로 전국적 의병전쟁 준비

임병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임병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시사저널e=이준영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임병찬(林炳瓚)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전라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주권을 완전히 잃은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해 의병전쟁을 준비했다. 

선생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이다. 5살 때부터 동리 사숙(私塾)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15세가 되던 해 전주부 감시(監試)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생계를 위해 사역(使役)에 종사했다. 선생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선생은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사람들을 구제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했다. 이에 1889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해 7월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됐다.

선생은 낙안군수에 부임한 후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탐관오리들의 행태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1890년 선생은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향민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동네 사람들과 뒷산에 올라 궁궐 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 강제로 외교권 빼앗기자 의병 일으키다

임병찬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했다. 선생은 1906년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외국과 관계를 막고 말 못하는 나라로 만들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했다. 

임병찬 선생과 최익현은 6월 4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정복해 군량과 군기를 확보했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의병이 900명으로 늘었다.

선생과 최익현이 지휘하는 의병진 앞에 일본군은 도망가고 군수와 그 관속(官屬)은 엎드려 사죄했다. 이에 민중은 호응했다.

6월 12일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전주와 남원진위대 군사가 공격해 왔다. 일제의 침략문제를 놓고 동족끼리 살상을 피하기 위해 의병을 해산했다.

그러한 가운데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詩海)가 전사했다. 선생과 최익현 등 13명은 일본군 사령부로 붙잡혀 감금됐다. 그 후 최익현은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순국했다. 임병찬 선생은 이듬해 1907년 1월 유배가 해제돼 귀국했다.

◇ 국권 회복 위한 광무황제 명으로 독립의군부 조직···의병전쟁 준비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자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던 중 1912년 음력 9월 28일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황제(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광무황제는 열강들에 대해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무력항쟁을 추진했다. 이에 1906년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한 것이다.

선생은 의병 활동 때부터 나름대로 구상했던 의병(義兵) 전략과 당시 일제 하에서의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해 상소했다. 관견은 일종의 독립의군부에 대한 종합활동계획서와 같은 것이다. 관견은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의 문답형식으로 구성됐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1913년 2월 광무황제로부터 사령총장(司令總將) 겸 전남북순무총장(全南北巡撫總將)에 임명됐다.

선생은 향약(鄕約)과 5가작통(五家作統)의 중요성에 착안해 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이 구상을 적용했다. 1913년 음력 정월에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전참판 이인순·이명상(李明翔)·곽한일(郭漢一) 및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해 음력 2월 김태흥·임당·송재준 등과 함께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구성했다.

1914년 2월 임병찬 선생은 상경해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해 독립의군부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고 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 중앙원수부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將)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廣州)에 5영(營)을 두어 사령총장, 참모부약장(參謀副約長) 각 1명, 매 부(府)에 관찰사(觀察使) 1명과 도약장(道約長) 1명, 각 군(郡)에는 군수 1명과 군약장(郡約長) 1명을 그 밑에 향장(鄕長), 면장, 이장, 통장(統長)을 배치해 조직적 편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1914년 3월 23일 이명상·이인순과 상의해 각도 각군 대표를 선정해 편성했다.

독립의군부의 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 주고 대규모 의병전쟁(義兵戰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에 독립의군부는 1914년 5월 일정한 날을 정해 참모총약장 1명, 참모부약장 5명, 참모약장 8명 등 14명은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기로 했다. 이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捺印)해 총독부(總督府)에 투서하며, 도약장은 각각 해당 부(府), 경무부(警務部)에 투서하고, 부·군약장은 각각 부, 군, 병참(兵站)에 투서를 계획했다. 또한 투서 2일전 새벽이나 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거사 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 했다.

1914년 5월 3일 선생은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중임(重任)돼 조직을 북부지방까지 확대했다.

◇ 일제에 한국침략 규탄·국권반환 요구

그러나 독립의군부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됐다. 독립의군부의 계획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총사령인 선생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총독 및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선생은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警務總監) 입화소일랑(立花小一郞)에게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주장했다.

그 해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에 일경은 6월 3일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감옥에 가뒀다. 선생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監禁)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됐다. 유배 후 단식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66세에 생애를 마감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한독립의군 임병찬 선생 창의기념비 / 이미지=국가보훈처
대한독립의군 임병찬 선생 창의기념비 / 이미지=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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