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섬멸
병력과 화력 열세에도 청산리 대첩 이뤄

이미지=시사저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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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안무(安武) 선생과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값진 승리를 이뤘다. 일본 정규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섬멸한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최초의 승리였다. 이후 선생은 독립군들과 함께 일본 정규군 2만여명을 격퇴해 청산리 대첩을 이뤘다. 선생은 자유시 참변 후 독립군을 다시 일으키던 중 일제와 교전 중 순국했다.

◇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독립투쟁 준비

안무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안무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안무 선생은 1883년 6월 29일 함경북도 경성(鏡城)군 행영(行營)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9년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입대해 서울 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한 후 무산 등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이에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해 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일군과 교전 중 전사한 장교가 11명, 사병은 57명, 부상자가 100여명이었으며 수많은 이가 붙잡혔다.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과 시위대의 항전, 일제의 잔인한 시위대 학살 행위는 지방 진위대 병사들을 격분시켰다. 이에 한국군의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일반 백성 중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일군과 싸우는 의병전쟁으로 확대됐다.

선생은 일제하에서 군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함북 경성의 함일학교(咸一學校)와 무산의 보성학교(普成學校)의 체육교사로 지냈다.

◇ 경술국치 후 만주서 국민회군 조직···봉오동 전투 대비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아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구국항쟁에 본격 뛰어들었다. 북간도 명동촌으로 가 항일활동을 하던 이동휘와 김약연 등을 만나 1919년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그 소속부대인 국민회군 300여명을 편성해 무장시켰다. 선생은 사령관으로 취임해 무장항일투쟁을 했다.

대한국민회는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간민회(墾民會) 출신의 인사들이 간민회의 한인자치와 독립전쟁의 전통을 계승해 결성한 단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방면에는 여러 개의 독립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북간도 지방과 훈춘에서 황병길, 박치환 등의 주도로 건국회(建國會)가 조직되고 화룡현 태랍자에서 충렬대가 조직됐으며 연길현 국자가에서는 자위단(自衛團)과 조선국민의사회가 조직됐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연길, 왕청, 화룡 3개현의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고 간도 대한국민회로 통합해 발전시켰다.

국민회는 3개현을 5개 구회로 나누고 그 밑에 52지회를 둬 기구를 정비 하고 임시정부 산하에 속하게 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훈춘 대한인국민회의 모든 회원을 합쳐 80여개소의 지휘로 확대했다. 이들 지회를 통해 거주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원하고 군자금 모집과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안무 선생은 국민회의 국민군 300여명의 훈련을 직접 담당해 정예부대로 키워 나갔다. 장정을 모집해 2개월간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는 니콜리스크에서 구입했다. 사관 양성을 위해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대한국민회는 군사조직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으로 나눴다. 대한독립군은 대한국민회의 산하 단체로서 국내 진입작전을 담당했다. 국민회군은 안무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국민회의 직속 군사조직으로서 대한국민회 관할구역 내의 북간도 지역을 순회, 주둔하면서 경찰군의 역할을 담당했다.

봉오동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인 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가 연합해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만들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켜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 계가 약 550명으로 모두 1200여명이었다. 무기는 기관총 2문, 장총 약 900정, 권총 약 200정, 폭탄 약 100개, 탄환 군총 1정당 150발을 보유했다.

연합독립군의 편성은 사령관에 최진동, 연대장에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에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에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을 임명했다. 안무 선생은 최진동 사령관의 부관에 임명됐다.

1920년 4월 20일 연길현 화전사에서 국민회와 군무도독부, 군정서의 중진 약 400명이 모여 군자금 모집, 장정의 소집 및 훈련, 무기증강 등 전략 강화책을 협의했으며 각 부대의 전력증강과 독립전쟁 성공을 위한 사업을 진행했다.

◇ 봉오동 골짜기서 일본군 섬멸···독립군 최초 승전

1920년 5월 28일과 6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무장 독립군들은 회령과 강양동에 있던 일제의 경비초소를 습격한 후 기지로 돌아왔다. 강양동 초소를 습격 당한 일군은 곧 남양(南陽)수비대장 신미이랑(新美二郞)에게 명해 강을 건너 삼둔자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 최진동은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방에 미리 잠복시켜 일군을 기습 격멸했다. 참패소식을 접한 나남(羅南)주둔 19사단은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까지 진입해 독립군을 공격했다.

홍범도는 진입해 오는 일군이 봉오골(현 봉오동)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을 전부 산중으로 대피시켰다. 독립신문 제88호(1920. 12. 25)는 전투전 피아의 형세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제1연대 병력을 봉오동 상촌(上村) 부근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를 했다가 적이 내도할 때에 그 전위(前衛)를 동구(洞口)에 통과케 한 후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 중에 입할 제에 호령에 의해 사격케 하고 연대 증원장교 이원(李園)은 본부급 잔여중대를 영솔하고 서북산간에 점위하여 병원증원(兵員增援)과 탄약보충, 양향급양(糧餉給養)에 임케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高麗嶺) 북편 약 1200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前端)에 약간 병원(兵員)을 분(分)해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하거든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佯敗退却)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樹下)에 재하여 지휘케 했다.

봉오동의 독립군 본영을 격멸하려던 일군의 추격대는 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동남쪽의 비파동을 거쳐 유원진으로 패퇴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적군(日軍)의 사자(死者)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오, 아군(독립군)의 사망자(死者)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다.

◇ 청산리로 이동, 격전 대비

독립군의 봉오동 승리는 독립군과 일군에 큰 충격을 줬다. 일제는 봉오동 전투의 패전을 겪고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독립군 토벌을 계획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한편 독립군들은 10년 이래 대승으로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각 독립군단의 군사 통합과 병력 보강 및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일제는 수많은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대비해 안무의 국민회 250여명은 의란구의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해 9월말 경 이도구 지역에서 진영을 재정비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은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고자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진군했다. 당시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 병력은 2000여명에 달했다. 화룡현 일대의 독립군 병력은 일군과의 일전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독립군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서 유인전과 매복전에 의한 섬멸 작전을 준비했다.

◇ 병력 불리함 속에서 청산리 대첩 이뤄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밤낮 없이 6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치뤄졌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국민회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들이 화룡현 이·삼도구 서북쪽과 어랑촌의 심산 장곡지대에서 2만여명의 병력과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의 토벌군과 10여회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때 안무 선생의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해 어랑촌 전투와 완루구 전투, 고동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전사 1200명, 부상 2100명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 130여명, 부상 220명이었다.

독립군의 값진 승전은 독립군 지도부의 뛰어난 전술과 용병술, 독립군 병사의 임전무퇴 정신, 동포들의 식량지원 및 정보제공 등으로 이룬 것이다.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명칭 아래 일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대병력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일제는 출병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매수해 훈춘사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해 훈춘의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을 공격하게 하고 일제는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 러시아 내전서 수많은 독립군 희생

청산리 대첩 후 독립군 부대들은 장기적인 항전의 기지를 찾아 밀산(密山)으로 향했다. 이후 국외 항일기지로 터전을 닦아오고 20만명이 넘는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노령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했다.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하겠다고 크게 선전했다.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일제에 대항한 장기 항전을 다짐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김좌진·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환·조동식·윤경천·오광선 등을 선임했다.

밀산에 집결했던 지청천·최진동·홍범도·김규식 등과 함께 안무 선생은 노령 이만을 거쳐 1921년 6월에 자유시에 도착했다. 독립군은 당시 러시아 한인군 지휘관의 한 사람인 오하묵(吳夏黙)의 주선으로 그곳 치타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독립군은 일제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백군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무렵 북경에서 일본 주중 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차카 반도 어업권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방택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며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시기에 일본과 불화를 갖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독립군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더욱이 1921년 6월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아(朴允文)의 사할린 의용대 간에 이념과 이해의 갈등이 발생하자 러시아 적군은 흑하변 스랍스크촌에 주둔하고 있는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장갑차까지 동원해 총격을 했다. 수많은 한인 무장대원들이 무참히 희생됐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이때 피해상황에 대해 간도지방 한국 독립단에서 발표한 ‘자유시 사변에 대한 성토문(聲討文)’에 따르면 대한의용군이 노군(露軍)과 싸운 결과 사망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의 대참변을 당했다.

당시 안무 선생의 군대는 제야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다. 선생의 국민회군은 이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북간도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간도로 돌아온 선생은 구춘선 등과 함께 왕청현 나자구 일대에서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경신참변 이후 초토화된 북간도 지역에서 독립군을 재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 진영의 대단결을 위해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선생은 국민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됐다.

1924년 용정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일경의 습격을 받고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용정에 있는 자혜(慈惠) 병원에서 치료했으나 9월 7일 42세에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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