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과 민족자결 천명해
국내 거족적 3.1운동으로 이어져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2.8독립선언기념비. / 이미지=국가보훈처
2.8독립선언기념비. / 이미지=국가보훈처

최팔용(崔八鏞)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생들과 2․8독립선언을 했다. 선생과 유학생들은 일제가 기만과 폭력으로 민족의사에 반해 한국을 강제 병탄했다며 한민족은 세계에 독립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과 세계에 한민족의 민족자결을 천명했다. 일제가 요구에 불응하면 영원히 혈전을 전개한다는 대일 항쟁 의지를 밝혔다. 이들의 2․8독립선언은 한반도의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1891년 7월 13일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향리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스무살이던 1910년 봄 일본으로 건너갔다.

선생은 동경에서 머무르던 중 일본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됐다는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통분해 즉시 귀국했다. 고향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독학하며 실력을 쌓고 상경해 오성중학교 정치과에 입학했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자주독립을 열망했다. 선생은 일본 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 학우회는 대한흥학회의 후신인 조선유학생친목회의 뒤를 이어 안재홍, 최한기, 서경묵 등의 주창으로 만들어졌다. 학우회의 운영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데 목표가 있었다. 대한흥학회 이래의 배일사상이 학우회로 이어졌다.

최팔용 선생은 학우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에서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국장과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 일본서 2․8독립선언 하다

선생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은 1918년 4월 13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개최된 조도전대학 동창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나타난다.

선생은 조국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최팔용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최팔용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선생은 그 해 여름 학지광의 편집위원이던 최승만에게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이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제안했다.

선생은 곧 비밀리에 동지들을 모았다. 후에 거족적으로 일어난 2.8독립운동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선생을 포함해 송계백, 이종근, 김도연, 전영택, 윤창석, 김상덕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됐다. 이들은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 그리고 결의문을 국문, 영문, 일문으로 작성해 자필로 서명하고 일본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했다. 또한 비밀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시키기로 하고 구체적 추진계획도 세웠다.

거사 전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위원들은 모여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요. 또 언제 나오게 될지 모르니 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 주시오”라며 후배들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대표들은 기소(起訴)될 것을 각오했다.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이 많이 내렸다. 오전 10시경에 대표들과 학생들은 이미 마련된 독립운동 문서들을 각국 대(공)사, 조선총독부, 동경 및 각지 신문사와 잡지사, 저명인사, 학자 등에게 우송했다.

동경 유학생들은 학우회 총회를 이날 오후 2시에 YMCA에서 열겠다는 통지를 받았다. 유학생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모였다. 동경 경시청은 이미 눈치를 채 오전부터 경찰이 주위를 감시했다.

동경 신전구 소석천정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라는 명목으로 동경 유학생 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학우회 회장 백남규가 재회를 선언했다. 최팔용 선생은 긴급동의를 청하면서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유학생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정숙하면서도 비장한 음성으로 낭독했다.

다음은 선언서에 나타난 2.8정신을 요약한 내용이다.

1. 한국은 역사적으로 단일민족이며 문화민족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국가주권이 외교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이외로는 근본적으로 침해당한 일이 없다는 것을 천명함.

2. 일본은 군국주의의 무력으로 한국 침략을 단계적으로 감행했으며, 한국과 일본이 러일전쟁 시에 체결한 국제관계를 배신한 일본을 사기범이라고 규정함.

3. 일제는 기만과 폭력으로 민족의사에 반하는 병탄을 감행했으므로 한민족은 세계의 정의 앞에서 우리의 독립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함.

4. 영, 미 양국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병탄되는 것을 승인했으므로 이 기회에 구악(舊惡)을 속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천명함.

5. 총독정치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강압하고 있다고 지적해 민주정치, 민주국가의 열망을 나타냄.

6. 종전으로 국제연맹이 생기면 군국주의와 강국의 횡포가 없어질 것이라고 밝히고, 국제사회에서 불의의 침략행위를 거부해 세계평화에 대한 의지를 굳게함.

7. 일본이 학생들의 요구에 불응한다면 영원히 혈전을 전개한다는 민족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 항쟁의 의지를 천명함.

8. 일본과 세계에 대해 한민족의 민족자결을 천명함.

유학생들은 선언문 낭독에 이어 시가행진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해산을 요구하고 탄압했다. 이에 학생들은 저항하며 일본경찰과 격투를 벌였다.

◇ 2.8독립선언은 3.1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날 오후 2.8독립운동대표 10명과 주모 학생 20여 명은 일경에 붙잡혀 서신전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들은 경찰서에서 수일 동안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최팔용 선생과 대표위원들은 정식재판에 회부됐다.

2월 10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유학생들에게 내란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그러나 어느 일본인 변호사가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춰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변론해 내란죄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에게 출판법 제26조가 적용돼 2월 15일 1심 판결에서 금고 1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이에 불복 공소해 3월 21일 공소심에서 금고 9개월을 받고 또 다시 상고하는 등 법정투쟁을 했다. 그러나 기각됐다.

2.8독립선언식은 끝났으나 이것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졌다. 뒷일을 인계 받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2월 12일 일비곡(日比谷) 음악당 부근에서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전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2월 23일 독립선언서 및 국민대회 청원서를 일본 국회에 보내고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 소집촉진부 취지서’를 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 경시청에 탐지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2.8독립선언은 3.1독립운동을 촉발시켜 전 민족이 일어나 독립을 궐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팔용 선생은 9개월의 금고형을 받고 소압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경의 엄중한 감시와 미행을 당하면서도 비밀리에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재기의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1922년 9월 14일 열망하던 독립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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