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가을 만주 청산리에서 일제 괴멸
교육과 종교로 독립군 정식력 토대 삼아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서일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서일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서일(徐一)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이끈 실질적 지도자였다. 선생은 독립을 위해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선생은 일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여겼다. 선생과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의 지휘 아래 독립군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제를 거의 전멸시켰다. 선생은 교육자·종교인·언론인이기도 했다.

서일 선생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선생은 25살에 을사조약 체결을 30살에는 망국(亡國)의 경술국치를 겪었다.

31살 때인 1911년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현실을 통분해하며 선생은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 만주 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 의병 모아 중광단 조직···대종교와 교육으로 독립군 정신력 원천

서일 선생은 한승점(韓承点)이 설립한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명동(明東)학교에서 왕청현 덕원리로 이주해오는 한인 자녀들을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길러줬다.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독립군들에게 정신력의 원천이 됐다. 선생은 단순한 무장 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된다.

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 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모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선생은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를 구축하고 대종교의 이념계승에 힘썼다.

선생은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 만명의 교우(敎友)를 얻었다.

선생은 교우들 중 젊은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선생은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청년들을 한배검에 귀의하게 했다. 한배검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대부분 대종교인이었다.

서일 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선생은 신도 1만5000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 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은 것을 보여준다.

선생은 중광단 등을 통해 대일 무장투쟁을 추진했으나 재정 문제 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 투쟁은 하지 못했다. 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신팔균(申八均), 손일민(孫一民), 신채호(申采浩)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며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또한 선생은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고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 신문을 발간했다. 이 신문을 통해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밝혔다.

선생은 1919년 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 10월까지 중광단을 확대 개편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선생은 결전의 날을 대비해 항일 군사들의 실력을 길렀다. 정규병력 1500여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士官)으로 양성했다.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를 확보했다.

◇ 청산리에서 일제 괴멸

일제는 만주의 항일 단체들과 독립군을 제거할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간도 지역으로 배치했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은 일제의 압력을 받던 중국 관리들의 강요로 본래의 근거지인 북간도를 떠나 허룽현, 이도구, 삼도구 등지의 삼림 지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일제는 이 같은 이동 정보를 파악하고 1920년 10월 20일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선생이 이끌던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 하에, 그리고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의 지휘 하에 매복과 기습, 작전상 퇴각과 연합 공격 등 치밀한 작전을 벌이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독립군들은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지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괴멸시켰다. 청산리대첩으로 불리는 이 전투는 한국 무장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업적이다.

청산리 전투 후 여러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領) 밀산(密山)으로 이동했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일·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500명의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서일 선생을 총재로 추대했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 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본 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 여기에 지방 도적들의 습격까지 받았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슬프고 분해 의분이 북받친 선생은 1921년 음력 8월 27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스스로 순국했다. 41세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살아온 선생이 남긴 유언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