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경 400명과 홀로 총격전 끝 자결 순국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 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김상옥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상옥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김상옥(金相玉) 선생은 항일 무력투쟁을 위해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한국인과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수백명의 일경과 홀로 대치한 상황에서 자결해 순국했다.

선생은 1890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기독교에 입교하고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공부했다.

선생은 1913년 경북에서 채기중, 유창순, 한훈 등과 함께 비밀결사 광복단을 조직했다. 이후 말총모자회사를 설립해 당시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상인들에 대항하며 국산품장려운동을 했다.

◇ 항일 무력투쟁 나서다

선생은 1919년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체험한 후 독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그해 4월 1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여사의 집에서 박노영,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전우진 등 청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4월 17일 각지 독립운동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을 게재한 ‘혁신공보’ 1호를 발행했다. 그해 9월까지 매회 1000부씩의 지하신문과 임시정부후원회 취지서, 항일전단을 제작해 배포했다. 선생은 신문제작의 재정지원과 배포 책임자로서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과 일제의 인쇄시설 압수로 9월에 신문발행이 중지됐다. 선생은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40여일에 걸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평화적인 방법의 독립운동이 가진 한계를 느끼고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 방안을 찾았다. 1920년 1월 중국 만주 소재 독립군 단체인 북로군정서에서 파견된 김동순을 만나 무력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협의했다.

그해 4월 김동순, 윤익중, 서대순 등과 함께 무장 의열투쟁을 지향하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했다. 선생은 철물상점의 경영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했지만 격렬한 항일 의열투쟁에 나섰다.

선생은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별도의 의열투쟁을 계획했다. 권총 40정, 탄환 3000발을 휴대하고 입국한 광복단결사대의 한훈과 협력해 연계투쟁의 방안을 찾았다. 선생은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총독 등 일제고관 처단과 적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 한훈과 김동순 등이 일제에 붙잡히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그 해 10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선생은 의열단에 가입해 의열 투쟁을 이어갔다. 1921년 7월 일시 귀국해 충청과 전라도 등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 한국인 억압 상징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지다

선생은 1922년 11월말 동지 안홍한과 트렁크식 나무 상자에 권총 4정과 탄환 800발 그리고 항일문서 등을 숨긴 채 일생일대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1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의 목적은 암살단 이래의 숙원이었던 종로경찰서 폭파와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처단이었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일제 식민통치 경찰력의 대표적 본부였다. 또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압살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 원한의 상징적 장소였다.

선생은 동지들과 작별할 때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해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는 말을 남겼다.

선생은 옛 동지들인 전우진과 이혜수의 집에서 정설교, 윤익중 등과 회의를 거듭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이들은 항일 문건과 독립운동자금 영수증, 인장 등을 제작하고 거사용 폭탄을 마련했다.

드디어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선생은 종로경찰서(현 장안빌딩 근처) 서편 동일당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이 경찰서 창문에 맞아 폭발했다.

선생은 폭탄 투척 후 용산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고봉근의 집으로 갔다. 다음 목표인 재등총독 처단을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삼판동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1월 17일 일본 제국의회에 참석차 동경으로 떠나는 재등총독을 서울역에서 저격,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을 사전 답사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동대문서 한인 순사 조용수의 밀고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됐다. 1월 17일 새벽 종로경찰서의 무장한 순사 14명이 고봉근의 집을 포위했다.

선생은 일경과의 격전 끝에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전촌장칠(田村長七)을 사살하고 금뢰와 매전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탈출했다. 선생은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면서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었다. 왕십리 근방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입고 변장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도착했다.

◇ 일경 400명과 홀로 총격전···자결 순국

선생은 이곳에서 동지들과 재등실 암살의 기회를 찾던 중 일경에 은신처가 발각됐다.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00여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해 1월 22일 새벽 5시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선생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장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수백명의 일경과 접전을 벌였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 등 수 명의 일경을 사살했다. 그러나 총알을 다썼다. 선생은 항복하든지 자결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선생은 마지막 총알이 장전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34세였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은 오직 조국독립을 필생의 목표로 삼고 한시도 그 목표를 잊어 본적이 없던 의사였다. 남들이 꺼리는 의열 투쟁의 선봉에서 서서 적지화된 서울 한복판에서 적의 심장부와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수백 명의 무장경찰과 대치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다 고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산화했다”고 밝혔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선생의 몸에는 열한발의 총상이 있었다. 선생의 시신은 1923년 1월 26일 가족들과 학생들의 울음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보훈처는 “선생이 남긴 항일행적과 민족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한줄기 빛과 같이 이어져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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