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례 옥고와 고문에도 독립운동 포기 안 해
의성단 조직해 일본영사관 습격, 적 60여명 처단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편강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편강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편강렬(片康烈) 선생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열여섯 살의 나이에 의병 선봉장으로 나섰다.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했으나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선생은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해 장춘성 내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적 60여명을 사살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항거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편강렬 선생은 1907년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했다. 선생과 의병들은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전국의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했다. 당시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해 싸웠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선생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강제로 한국의 통치권을 빼앗아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 했다. 그러나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 총독암살모의사건’(105인사건)에 연루돼 2년여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 선생은 영남 일대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의 이러한 굳은 뜻은 의병정신에서 비롯됐다. 선생의 생애는 의병정신을 몸소 실천한 산 기록이다”고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精粹)다.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멸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 3.1 독립만세운동···무장투쟁단체 의성단 조직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선생은 연안읍에서 사기점을 경영했다. 국권회복의 뜻을 품은 동지들은 물건을 사러 가는 것처럼 해서 그곳을 드나들었다. 선생과 동지들은 해성면 초장리의 유지 정종호의 집 뒷산에 모여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일경의 감시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지만 3월 15일 이후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3·1독립만세 이후 선생은 황해도 안악에서 최명식(崔明植)·간병제(簡秉濟) 등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은 군립군의 국내 진입 시 원조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밀정의 밀고로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징역 1년 2월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옥살이 후 편강렬 선생은 1921년 쇠약해졌다. 부인과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선생은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갔다. 선생과 동지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무장 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선생은 1923년 10월경 산해관(山海關)에서 강진지(姜震之)·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됐다. 의성단은 교민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했다. 의성단은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힘썼다.

◇ 일본영사관 습격해 60여명 처단

선생과 의성단 단원들은 1924년 장춘성 내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했다.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명을 처단했다. 또한 봉천(심양) 시내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해 다수의 적을 사살했다.

당황한 일제 총독부는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해 선생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은 장춘 시내에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벽보를 붙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독립운동 단체 통합 노력···“나라 찾기 전엔 고국으로 이장 마라”

1924년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운동에 나섰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있었고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달랐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이 독립운동 전선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통합운동에 힘썼다.

선생은 1924년 7월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고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광정단·대한독립단·통의부·노동친목회 등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했다.

이후 선생은 하얼빈으로 가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하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선생은 일경에게 포위당해 총격전 끝에 붙잡혔다.

선생은 1925년 3월30일 징역 7년 형이 확정됐다. 선생은 재판정에서 크게 웃으며 의연하게 돌아섰다.

선생은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죽음에 직면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가족과 친지들은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1929년 1월 16일 선생은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다음은 1926년 신의주형무소에서 선생이 지은 시다.

양양(洋洋)한 압록강수(鴨綠江水)는 밤낫으로 흘너가는 곳 어데이뇨

유유(悠悠)한 나의 심사(心思)

너를 따라 거지업다

외외(巍巍)한 금수봉(錦繡峯)아!

흘립천장(屹立天丈) 놉히서기

깁흔 담장안 너 그러워

탄식하는 너의 녯 주인(主人)

창공(蒼空)에 밝아 잇는 저 명월(明月)

아- 누구를 위하여서!

교교(皎皎)히 벗치엿는 창공(鐵窓)에

깁흔 한(恨)은

망국혼(亡國魂)이 늑기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버서나

사랑하는 너를 질길소냐?

(동아일보1926년 9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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