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순국···“저 세상에서도 독립운동 하리라”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조명하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명하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조명하(趙明河) 선생은 한반도 침략 원흉인 일제의 육군대장 목에 칼을 던져 제거했다. 선생의 의거는 조직적 배후 없는 단독 거사였다. 한국을 침략해 병탄한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을 위한 행동이었다. 선생은 의거로 인해 24살에 순국했다.

선생은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26년 3월 신천군청에서 일하면서 같은 황해도 출신의 김구 선생과 노백린 선생 등 독립운동 선각자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각오했다.

그 무렵 아들 혁래(赫來)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 하던 부인 오금전(吳金全) 씨를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던 길에 조의사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처자식을 만나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독립운동을 위한 길을 나선 것이다.

선생은 ‘항일을 위해 우선 일본을 알아야한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공장직원, 상점원 등으로 일하며 오사카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했다.

선생은 일본인의 차별과 모욕적 언사를 당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가졌다. 선생은 오사카에서 일제의 수괴를 없앨 기회를 잡기 어렵다는 판단에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기로 결정하고 타이완으로 갔다.

◇ 원흉 일제 육군대장 목에 칼 던져 제거

조명하 선생은 1927년 11월 타이완에 도착했다. 선생은 타이중시(臺中市)에 있는 한 찻집에서 일하면서 우리와 같이 일제의 침략에 고통받는 타이완 원주민들의 실상을 봤다.

당시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의 산둥성(山東省)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이완은 이를 위한 전진기지였다. 이에 많은 일제 병력이 타이완에 있었고 타이완 주둔 일본군을 특별검열하기 위해 검열사가 파견됐다.

조명하 선생은 육군 특별검열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王)가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군사 참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구니노미야의 타이중(臺中) 일정도 알아냈다.

선생은 우리 겨레의 한을 풀기 위해 강제적으로 나라를 빼앗은 원흉인 구니노미야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타이중(臺中)역에서 타이완지사관사에 이르는 노정과 구니노미야가 머무를 예정인 지사관사 부근의 정황 등을 세밀히 살폈다. 5월 14일 선생은 결연한 마음으로 단도에 극약을 바르고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 나갔다.

도로 양쪽에는 많은 경비군경들이 있었다. 군중 사이에 있던 선생은 지사 관사에서 구니노미야를 태운 지붕 없는 자동차가 오전 9시 55분경 타이중(臺中)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 하려는 순간 단도를 들고 자동차 뒤쪽에 뛰어 올랐다.

차에 동승했던 오누마(大沼) 무관장(武官長)이 구니노미야의 몸을 감쌌다. 선생은 구니노미야를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명하 선생은 거사 후 중국 군중을 향해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생은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선생은 일제 군경에 포박을 당해 타이페이 형무소로 이송돼 독방에 수감됐다. 그해 7월 18일 타이완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이른바 ‘황족위해죄(皇族危害罪)와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3개월 뒤인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때 나이 24살이었다.

◇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조명하 선생은 순국 직전 “할 말이 없는가”라는 물음에 이같이 말했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선생이 순국한지 3개월여 뒤인 1929년 1월 27일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는 단검의 극약이 온 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다. 한국 및 동아시아 침략의 원흉인 제국주의 일본의 육군 대장 척살에 성공한 것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우리의 무력 독립 운동은 대체로 조직적이고 배후가 있었으나 조명하 선생의 의거는 단독 거사였다.

보훈처는 “선생의 거사는 중국 침략을 앞두고 있던 일본에 대한 단호한 경고였다”며 “선생의 의거는 단독 거사로 밝혀졌다.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한국인의 의지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뼛속 깊이 맺혀 있는지를 알려준 사건이었다”고 했다.

보훈처는 이 같은 의거들로 인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해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아갔다고 했다.

선생의 유해는 1931년 4월 중순 고향인 장천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6․25 후 자손들이 월남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유택이 마련됐다. 1978년 5월 타이페이시 한교학교(韓僑學校)에 조명하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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