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번 옥살이에도 독립운동 이어가
‘광야, 청포도’ 등 시와 글로 민족의식 깨워
의열단 활동으로 군자금 전달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이원록(이육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이원록(이육사) 선생 / 이미지=국가보훈처

이육사 선생(본명 이원록李源祿)은 독립운동 활동으로 17번의 옥살이를 했지만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열단 활동을 통해 국내 정세를 의열단에 알리고 군자금을 전달했다. 건강이 악화된 후에는 민족시인으로서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쳤다. 광야와 청포도 등의 시를 썼다. 무장항일운동을 위해 조선군관학교를 수료하고 국내정세조사 활동도 했다.

이육사 선생은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고 아호는 육사(陸史)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육사 선생은 형제 간 우애가 지극했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이었다.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했다.

선생은 17세에 대구로 이사해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결혼했다. 1923년 일본에 건너가 1년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 1925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의열단 활동···국내 정세 알리고 군자금 전달

이후 이육사 선생은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다. 선생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하는 활동을 하다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윤세주의 의열투쟁에 감화를 받았다.

당시 의열단은 중국 길림에서 북경으로 이동해 의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육사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했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가 거사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했다. 이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했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온갖 고문을 했다. 나중에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년 4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

출옥 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나섰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 돼 요양하고 있을 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다시 붙잡혔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한 후 귀국했다.

◇조선군관학교 수료···민족의식 환기·국내정세조사

선생은 1932년 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루쉰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의논했다. 후일 루쉰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루쉰의 작품 ‘고향’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에 입교했다. 이 훈련반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해 설치한 한국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조선군관학교는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총기 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 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을 편성했다.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해 6개월로 했다. 교관은 한국인 20여명으로 편성했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1933년 4월 23일 수료 후 선생은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해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 조사 등 비밀임무 활동을 했다. 1934년 5월 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광야’ 등 시와 글로 민족의식 깨우다

그러나 이육사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됐다. 선생은 앞으로 진로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됐다.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에 문인으로서 새 출발하기로 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했다. 1936년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시를 발표했다.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도 발표했다.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 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를 선뵀다.

1941년 일제는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했다. 그러나 선생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지만 민족의실을 깨우기 위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1942년에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하고 수필, 평론, 번역 등 다양한 문필활동을 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으로 1943년 5월 귀국했다.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혀 북경으로 이송됐다.

◇북경감옥에서 순국

가족들은 뜻밖에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북경 감옥에서 선생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들었다. 막내 동생 원창이 북경으로 달려갔다. 선생의 유해는 이미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줌의 재로 변해 작은 상자에 담겨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해 선생을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1960년 봄 선생의 유해는 낙동강이 보이는 고향 원촌으로 이장됐다.

선생은 17번의 옥살이를 하면서도 독립을 위해 의열투쟁 대열에 앞장섰다. 건강이 악화된 후에는 민족시인으로서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일깨웠다.

보훈처는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며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난 선생의 시문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갖게 했다”고 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