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지원, ‘독립신문’ 등사해 시민 전달
인격 가진 ‘인간’으로 어린이 대우···어린이날 제정

2020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수립과 3.1 운동 101주년을 맞았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만세운동을 했다. 다음달인 4월 11일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다. 이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사저널e는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삶을 기사화한다. 특히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명한다. [편집자 주]

방정환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방정환 선생 / 사진=국가보훈처

어린이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소파 방정환(方定煥) 선생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선생은 학생 때부터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해 시민들에게 전달하며 3.1운동을 지원했다. 선생은 어린이를 인격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방 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궁핍했지만 생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민족운동에 뛰어들다

선생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선생은 1917년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했다.

1918년 7월 7일 선생은 이중각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음악회 개최, 연극 공연,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등 계몽활동을 주로 했다. 또한 잡지 ‘신청년’을 발간했다. 경성청년구락부 활동은 1920년대 초 실력양성운동의 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조직했다. 선생은 이 단체의 간의원으로 선출돼 교리강연부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했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꿨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 개벽사를 설립해 월간지 ‘개벽’을 발간했다. 방정환은 개벽 기자로도 활동했다.

◇3.1운동 지원한 방정환과 청년·학생들

선생은 장인인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에 선생을 중심으로 경성청년구락부는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했다.

선생과 청년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해 시민에게 돌렸다. 독립신문은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이종일이 발의해 발간한 지하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1만~1만5000장이 발행됐다. 선생과 청년들은 3.1운동 중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이를 나눠줬다. 새벽에 남녀 학생들이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했다. 짚신을 신으면 소리가 덜나기 때문이다.

이 일로 조선총독부 경찰은 선생을 체포해 일주일 동안 구금하며 온갖 고문을 했다. 석방된 이후 선생은 비밀장소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어린이를 ‘인간’으로 대우

선생은 1920년 ‘어린이 노래’를 번역해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선생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색동회 등이 대표적이다.

선생은 김기전과 이돈화 등 천도교 어린이운동 이론가의 주장을 실천했다. 김기전, 이돈화는 어린이를 인격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서 대우할 것을 주장했다.

천도교 소년운동의 이론을 이끈 김기전은 “전통사회의 유교적 제도와 체제가 소년의 인격을 말살했으며, 조선이 해방된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년을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돈화는 “사람의 개조 본위는 온전히 아동문제에 있다”며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선생은 1923년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병으로 눕고 사망하기 전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선생은 1923년 3월 16일 동경에서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등과 함께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진장섭과  어린이날 제정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소년단,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이 조직됐다. 선생은 1923년 4월 17일 이들 단체 등 40여개의 소년운동단체와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었다.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날을 주관하게 됐다.

어린이운동과 청년운동,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선생은 무리한 활동에 따른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1931년 7월 23일 만 31세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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