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초입에 도착한 다섯 권의 소설들.

 

① <시절과 기분> 김봉곤

김봉곤의 소설은 여름 초입 같다. 잎사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수런수런 울리고, 문이 열리면 아찔한 빛이 쏟아져 환해지는 계절. 화자는 한 시절, 누군가를 만나 그를 통과하며 변화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시 그 시절을 환기하며 현재와 과거를 잇는다. 시차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만 이내 자신이 통과한 것들을 선선히 끌어안는다. 그렇게 발굴된 시절은 곧 그의 소설이 된다. 작가의 말에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라고 썼듯, 김봉곤의 소설은 자기 고백적이다. 섬세한 언어로 생생하게 쓴 다이얼로그 같은 그의 소설엔 사랑이 짙게 녹아 있다. 수록작 ‘데이포 나이트’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어떠한 사건을 겪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② <밤의 책> 실비 제르멩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페니엘이라는 성을 가진 남자가 있다. 이름 없이 성만 있는 그는 뱃사람으로, 태초의 낙원 같은 물의 세계에 살았다. 여섯 아이를 떠나보낸 후에야 아들을 낳고, 여섯 명 분의 생명을 응축한 그는 무럭무럭 자라 빅토르플랑드랭을 낳는다. 페니엘 가문은 1870년 보불전쟁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의 어두운 밤들을 통과하며 숱한 생채기를 남기고 살아남는다. 실비 제르맹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역사와 신화를 뒤섞으며, 혹독하고 비정한 세계에 절망하고 때론 맞서는 인간의 삶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다. 무수한 밤들 속에서 신은 침묵하고, 인간은 다만 희미한 빛을 좇는다. 수 세대에 걸친 연쇄적 악과 불행의 역사를 관능적인 언어로 펼쳐내는 소설이다.

 

③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어둡고 혼란했던 1950년 페루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한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을 그려낸 소설이다. 부르주아 출신인 싼띠아고는 산마르코스 대학에 입학하지만 반독재 공산주의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경찰에 연행된다. 부르주아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은 싼띠아고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지만, 우연히 한 비밀을 알게 되며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마르케스와 보르헤스가 전통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 역사와 신화를 뒤섞었다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당시 페루의 사회상을 면도날로 베어내듯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리며 역사에 대한 비관,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드러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사 요사는 체제 앞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러나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 치열하게 맞설 수 있는지 보여준다.

 

④ <아이젠> 김남숙

이상한 소설이 도착했다. 최근 젊은 소설가들이 활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경향성과 다르게, 김남숙의 첫 소설집 <아이젠>에선 외따로 노는 외골수처럼 혼잣말이 이어진다.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밑바닥 삶, 훼손된 생의 감각과 죽음 충동을 중얼중얼 토해내는 문장들. “모두들 이런 기분을 참으며 살아갈까. 살아 있어도 죽은 느낌. 죽은 것 같지만 살아 있는 느낌.”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자신을 파괴하려는 충동에서 역설적으로 길어 올려지는 생명력, 살고자 하는 정념이 방범용으로 꽂아놓은 깨진 유리병처럼 날카롭고 선연하다. 김남숙은 ‘작가의 말’에서 “어떤 사람은 실소하겠지만 나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 나를 어느 정도 개호할 수 있는 방법처럼 느껴진다. (…) 그렇기에 살아야지”라고 말한다. ‘이상한 소설’에서 영주가 종수에게 묻듯이 이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 듯하다. “살았니, 죽었니?”

 

⑤ <떠도는 땅> 김숨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 아이의 물음과 함께, 어두컴컴한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린 채 어디인지도 모를 땅으로 실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소련 극동 지역에 거주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 17만 명의 이야기다. 일본군 위안부, 입양아, 철거민 등 소외된 약자들의 삶을 보듬어 그려왔던 작가 김숨이 이번엔 고려인 17만 명의 디아스포라를 그렸다. 말라붙은 빵과 이주한 곳에 심을 씨앗만을 품은 채 황량한 땅을 향하는 이들. <떠도는 땅>은 이방인들, 뿌리 잃고 떠도는 존재들의 삶을 곡진하게 복원해낸다. 뿌리 내리고 벼를 심을 땅대신 끝없이 달리는 열차 위에서 부유하는 불안과 향수가 임신한 여성, 아이, 노인 등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로 살아난다.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에도 존재하는 난민과 경계를 서성이는 사람들을 잊지 않게 하는 작품이다.

 

 

아레나 2020년 06월호

https://www.smlounge.co.kr/arena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최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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