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 이후 여성 기피 문화 생겨… 전문가 “마땅한 성폭력 대안 마련해야”

/ 사진=셔터스톡

#중소 물류기업에 다니는 유아무개(31‧여)씨는 최근 직장 내 남사원들로부터 ‘펜스룰’을 실천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분란을 만들 소지를 없앤다는 이유였지만, 유 씨는 펜스룰로 인해 오히려 소외감을 느꼈다. 그에게 말을 거는 남사원들도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는 “물류 기업은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미투가 화제가 되고, 펜스룰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회사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 느낌이다”라고 전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 바람이 분 이후, 직장 내 ‘펜스룰’이 확대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사원 수가 적고, 남녀 사원 간 직접적인 접촉이 많은 중소기업에서 이 같은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펜스룰은 아내 이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말에서 비롯된 용어로, 의도적으로 여성을 배제하는 생활신조를 뜻한다. 최근엔 국내에서 미투 운동에 대한 대처 방식으로 등장했다.

직장은 펜스룰이 확대되는 주요 장소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팀블라인드가 전국 직장인 49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투 운동 후 회사에 달라진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설문대상자 32%에 해당하는 1570명이 “펜스룰이 생겼다”고 답했다.

직장 내 남사원들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 받지 않기 위해 여사원들과 회식을 하지 않고 업무지시도 전화와 메신저로 하는 등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사원 수가 적은 중소기업의 경우, 업무 관련 대화가 직접 소통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여사원들이 펜스룰로 인해 업무 참여 기회를 잃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중규모 반도체 기업에서 근무하는 박아무개(29‧여)씨는 “미투가 번진 이후로 회사에서 종종 ‘이제 (여사원과) 밥도 같이 먹으면 안 되나’. ‘무서워서 대화도 제대로 못 하겠다’ 같은 말을 들어왔다. 중규모 기업이라 업무 관련 소통을 하는 게 중요한데, 업무 지시도 모바일 메신저로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데, 왜 여사원 자체를 기피하는 지 모르겠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업무에서도 배제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남사원들은 혹여 오해의 소지를 만들까봐 매순간 조심할 바엔 아예 여사원들과 부딪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IT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홍아무개(33‧남)씨는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성희롱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IT 소규모 기업인 만큼 여사원들이 많지 않아, 매순간 그 기준을 살피면서 일해야 한다. 그럴 바엔 업무 관련 대화도 카카오톡으로 하고, 업무 관련 일이라도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여사원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최대한 피해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마땅한 성폭력 예방책이 없다보니 잘못된 예방 방식을 택하는 분위기라며, 펜스룰이 남녀고용평등법, 근로기준법을 위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 제7조에 따르면 채용과정에서 남녀를 차별할 경우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또 근로기준법 제6조엔 남녀의 성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하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펜스룰 또한 법 위반 소지가 있다. 직장 내에서 펜스룰을 이유로 업무 분리를 할 경우, 분리 행위 자체가 성차별이 된다. 근로감독관에 신고도 할 수 있다”며 “중소기업을 비롯한 국내 직장에는 이미 성차별이 존재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요 업무에서 배제되는 현상도 꾸준히 있어왔다. 펜스룰이 이런 성차별 현상을 더 확대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도 펜스룰을 또 하나의 성차별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19일 열린 현안점검회의에서 펜스룰을 명분으로 업무에서 여성을 제외할 경우 성차별적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지난달 23일 열린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펜스룰로 인해 직장 내 또 다른 성차별이 생겼다며, 엄중 대응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